kāmānaṃ-rūpānaṃ-vedan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ti의 용례
kāmānaṃ-rūpānaṃ-vedan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ti의 용례
1. bharaṇḍukālāmasuttaṃ (AN 3.127-바란두 깔라마 경) ― 세 가지 스승의 차이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그 밤이 지나자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하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마하나마여, 세상에는 이런 세 가지 스승이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만,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하고 경험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한다.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만, 경험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한다. 여기, 마하나마여, 어떤 스승은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경험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한다. 마하나마여, 세상에는 이런 세 가지 스승이 있다. 마하나마여, 이런 세 가지 스승들에게 완전한 경지는 같은가 아니면 완전한 경지는 제각각인가?”
이렇게 말했을 때, 바란두 깔라마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도 바란두 깔라마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도 세존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도 바란두 깔라마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같다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도 세존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 paṭhamakosalasuttaṃ (AN 10.29-꼬살라 경1) ― 부처님은 세 가지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함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궁극의 열반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줄어듦-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 것이 지금여기의 궁극의 열반의 선언 가운데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알려진 나를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근거 없고 헛되고 거짓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비방한다. ― '사문 고따마는 욕(慾)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하고, 색(色)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하고, 수(受)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욕(慾)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색(色)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수(受)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한다. 지금여기에서 갈망이 없고 꺼졌고 식은 나는 집착이 없는 완전한 열반을 선언한다.
3) mahādukkhakkhandhasuttaṃ (MN 13-괴로움 무더기 큰 경) ― 세 가지 완전한 지혜는 무엇인가?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ㅡ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소유의 삶[욕(慾)]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우리도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도반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물질[색(色)]들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우리도 물질[색(色)]들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경험[수(受)]들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우리도 경험[수(受)]들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합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즉 법을 설함과 가르침의 근본에 있어 사문 고따마와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습니까?”
4. kām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nti만 설해진 경 ― cūḷadhammasamādānasuttaṃ (MN 45-법의 획득의 작은 경)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의 획득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현재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운 보(報)가 따르는 법의 획득이 있다. 비구들이여, 현재도 괴롭고 미래에도 괴로운 보(報)가 따르는 법의 획득이 있다. 비구들이여, 현재는 괴롭지만 미래에는 즐거운 보(報)가 따르는 법의 획득이 있다. 비구들이여, 현재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보(報)가 따르는 법의 획득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현재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운 보(報)가 따르는 법의 획득인가?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보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ㅡ ‘소유의 삶에 결점이 없다.’라고. 그들은 소유의 삶에 빠져서 살아간다. 그들은 머리에 매듭을 묶은 유행녀들에게 시중들게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소유의 삶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 있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어떤 면에서 소유의 삶의 버림을 말하는가,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는가? 유행녀의 부드럽고 유연하고 솜털 같은 손의 접촉은 즐거움을 준다.’라고. 그들은 소유의 삶에 빠져서 살아간다. 그들은 소유의 삶에 빠져서 살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고통스럽고 가혹하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들을 경험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이것이 소유의 삶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 있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소유의 삶의 버림을 말하는 것이고 소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소유적 사유가 원인이고 소유적 사유가 인연인 이런 고통스럽고 가혹하고 날카롭고 혹독한 느낌들을 경험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