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
4. 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렀다. 그때 위사카 남신자가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하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위사카 남신자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 “스님, ‘유신(有身-몸 있음), 유신’이라고 불립니다. 스님, 무엇이 유신(有身)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오취온(五取蘊)]가 유신(有身)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는데,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가 유신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sakkāya: the existing body. (m.) as a t.t. in P. psychology almost equal to individuality(개성. 특성. 인격); identified with the five khandhas
; sat-kāya → sat = sant(ppr. of atthi-√as) – ①being. existing. ②good. true.
- (몸 있음)
[초기불전연구원] 존재더미 또는 자기존재 —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개체 —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PTS] own body — the five groups of grasping
[Thanissaro Bhikkhu] self-identification — the five clinging-aggregates
[Sister Upalavanna] self — the five holding masses
[Lord Chalmers] personality — the Five Attachments to existence
[Bhikkhu Bodhi] identity — the five aggregates affected by clinging
“감사합니다, 스님.”이라고 위사카 남신자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 “스님, ‘유신의 자라남, 유신의 자라남’이라고 불립니다. 스님, 무엇이 유신의 자라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다시 존재가 되고, 소망과 탐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애(愛) 즉 소유의 애, 존재의 애, 존재에서 벗어남의 애[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가, 도반 위사카여, 유신의 자라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유신의 소멸, 유신의 소멸’이라고 불립니다. 스님, 무엇이 유신의 소멸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그 애(愛)의 완전히 바랜 소멸, 포기, 놓음, 풀림, 잡지 않음이, 도반 위사카여, 유신의 소멸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유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 유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라고 불립니다. 스님, 무엇이 유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이것,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유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취(取-집착)가 곧 오취온(五取蘊)입니까, 아니면 오취온으로부터 다른 곳에 취(取)가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취(取)가 곧 오취온인 것도 아니고, 오취온으로부터 다른 곳에 취(取)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욕탐(欲貪)이 오취온 거기서 취(取)입니다.”
“그러면 스님, 어떻게 유신견(有身見)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색(色)을 아(我)로부터 관찰합니다. 색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아에서 색을 관찰하거나, 색에서 아를 관찰합니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식(識)을 아로부터 관찰합니다. 식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아에서 식을 관찰하거나, 식에서 아를 관찰합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유신견이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PTS] regards material shape as self or self as having material shape or material shape as in self or self as in material shape
[Thanissaro Bhikkhu] assumes form (the body) to be the self, or the self as possessing form, or form as in the self, or the self as in form.
[Sister Upalavanna] reflects matter in self, or a material self, or in self matter, or in matter self.
[Lord Chalmers] he views material Form as Self, or Self as having Form, or Form as in Self, or Self as in Form.
[Bhikkhu Bodhi] regards material form as self, or self as possessed of material form, or material form as in self, or self as in material form
“그러면 스님, 어떻게 유신견이 없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고, 고결한 법에 대해 능숙하고,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을 아로부터 관찰하지 않습니다. 색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아에서 색을 관찰하거나, 색에서 아를 관찰하지 않습니다. 수를 … 상을 … 행들을 … 식을 아로부터 관찰하지 않습니다. 식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아에서 식을 관찰하거나, 식에서 아를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유신견이 없습니다.”
“스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이것,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입니다.” “그러면 스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은 유위(有爲)입니까? 아니면 무위(無爲)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은 유위입니다.”
“스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에 의해서 세 가지 온(蘊)이 따라지는 것(saṅgahitā)입니까 아니면 세 가지 온에 의해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따라지는 것(saṅgahito)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에 의해서 세 가지 온이 따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온에 의해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따라지는 것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계온(戒蘊) 위에서 정어-정업-정명의 법들이 따라지고, 정온(定蘊) 위에서 정정진-정념-정정의 법들이 따라지고, 혜온(慧蘊) 위에서 정견-정사유의 법들이 따라집니다.
“그러면 스님, 무엇이 삼매입니까? 어떤 법들이 삼매의 상(相)들입니까? 어떤 법들이 삼매를 보호하는 것들입니까? 무엇이 삼매수행(三昧修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이 삼매이고, 사념처(四念處)가 삼매의 상(相)들이고, 사정근(四正勤)이 삼매를 보호하는 것들이고, 여기서 그 법들의 실천과 닦음을 많이 행하는 것이 삼매수행입니다.”
“그러면 스님. 몇 개의 행(行)들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런 세 가지 행들이 있습니다. —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그러면 스님, 무엇이 신행이고, 무엇이 구행이고, 무엇이 심행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도 날숨도 신행이고,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이고, 상(想)과 수(受)가 심행입니다.”
“그러면 스님, 왜 들숨도 날숨도 신행이고, 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이고, 왜 상과 수가 심행입니까?”
• paṭibaddha: bound to(묶다); depent on(의존하다); attracted on or by(끌어들이다. 불러일으키다). (pp. of paṭibandhati)
“도반 위사카여, 들숨도 날숨도 몸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몸이 의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들숨도 날숨도 신행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위딱까 한 뒤, 위짜라 한 뒤 나중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입니다. 상과 수는 심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심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과 수가 심행입니다.”
“그러면 스님, 어떻게 상수멸(想受滅)의 증득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을 증득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했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그렇게 심(心)을 닦은 그것이 그런 상태로 이끕니다.
“그러면 스님,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첫 번째로 소멸합니까? 신행입니까? 또는 구행입니까? 또는 심행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구행이 첫 번째로 소멸합니다. 그로부터 신행이, 그로부터 심행이 소멸합니다.”
• (AN 9.31-차제멸(次第滅)경) 참조
“그러면 스님, 어떻게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나옴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오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올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왔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그렇게 심(心)을 닦은 그것이 그런 상태로 이끕니다.”
• (MN 43-교리문답의 큰 경)에서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의 유지 ― pubbe ca abhisaṅkhāro 이전의 준비
“그러면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오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첫 번째로 일어납니까? 신행입니까? 또는 구행입니까? 또는 심행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오는 비구에게 심행이 첫 번째로 일어납니다. 그로부터 신행이, 그로부터 구행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 비구에게 몇 가지의 촉(觸)들이 닿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 비구에게 세 가지의 촉들이 닿습니다. — 공(空)의 촉, 무상(無相)의 촉, 지향 없음의 촉”
“그러면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 비구에게 심은 무엇으로 굽어 있고 무엇으로 경사져 있고 무엇으로 이끌립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 비구에게 심은 떨침으로 굽어 있고 떨침으로 경사져 있고 떨침으로 이끌립니다.”
“스님, 몇 가지 경험[수(受)]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런 세 가지 경험이 있습니다. — 즐거움의 경험, 괴로움의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
“그러면 스님, 무엇이 즐거움의 경험이고, 무엇이 괴로움의 경험이고, 무엇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심(心)에 속한 것인 즐거움과 편안함 — 이것이 즐거움의 경험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심에 속한 것인 괴로움과 불편함 — 이것이 괴로움의 경험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심에 속한 것인 편안함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닌 것 — 이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입니다.”
• (SN 48.38-분석 경3) 참조
“그러면 스님, 즐거움의 경험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습니까? 괴로움의 경험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습니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경험은 유지되면 즐거움이고 변화하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의 경험은 유지되면 괴로움이고 변화하면 즐거움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은 알면 즐거움이고 모르면 괴로움입니다.”
“그러면 스님, 즐거움의 경험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로움의 경험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경험에 의해 탐(貪)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로움의 경험에 의해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 의해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합니다.”
“그러면 스님, 모든 즐거움의 경험에 의해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모든 괴로움의 경험에 의해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 의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움의 경험에 의해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움의 경험에 의해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 의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스님, 즐거움의 경험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하고, 괴로움의 경험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경험에서 탐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괴로움의 경험에서 저항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합니다.”
“스님, 모든 즐거움의 경험에서 탐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모든 괴로움의 경험에서 저항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움의 경험에서 탐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움의 경험에서 저항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것에 의해 탐을 버립니다. 그때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성자들이 지금 성취해 머무는 그 경지를 나는 언제 성취하여 머물 것인가?’라고. 이렇게 최상의 해탈에 대한 갈망을 확고히 할 때 갈망의 조건을 원인으로 고뇌가 일어납니다. 그것에 의해 저항을 버립니다. 그때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것에 의해 무명을 버립니다. 그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스님, 즐거움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괴로움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스님, 괴로움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로움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즐거움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스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명입니다.”
“그러면 스님, 무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무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명입니다.”
“그러면 스님, 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해탈입니다.”
“그러면 스님, 해탈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해탈에게 대응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그러면 스님, 열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질문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질문들의 끝을 잡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열반에 닿는 범행은 열반을 구원으로 하고 열반을 완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반 위사카여, 그대가 원한다면 세존께 가서 이것의 의미를 여쭤보십시오.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는 받아들이십시오.”
그러자 위사카 남신자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뒤에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위사카 남신자는 담마딘나 비구니와 함께 나눈 우정의 대화를 그대로 모두 세존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자 세존은 위사카 남신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현자이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큰 지혜를 가졌다. 위사카여, 만약 그대가 나에게 이것의 의미를 물었다 해도 나도 그것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담마딘나 비구니가 말한 것이 그것의 의미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여라.”라고.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위사카 남신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다.
“감사합니다, 스님.”이라고 위사카 남신자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 “스님, ‘유신(有身)의 자라남, 유신의 자라남’이라고 불립니다. 스님, 무엇이 유신(有身)의 자라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다시 존재로 이끌고, 소망(所望)과 탐(貪)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애(愛) 즉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가, 도반 위사카여, 유신의 자라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yo kho, āvuso visākha,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ay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nirodho vutto bhagavatā”ti.
“도반 위사카여, 오직 그 애(愛)의 완전히 바랜 소멸, 포기, 놓음, 풀림, 잡지 않음이, 도반 위사카여, 유신의 멸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두 곳 다 말씀하셨습니다. 가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