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44. 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칼을 쓰다) & 중유(중음신) 없음](근…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44. 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칼을 쓰다) & 중유(중음신) 없음](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40522)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Dho4zbMcIc&t=8s
병문안을 간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에게 찬나 존자는 고통이 심해서 결점 없는 칼을 써야겠다고 말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결점 없이 칼을 쓸 것을 검증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문답에 이어 마하쭌다 존자가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고 …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고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라고 말하고 돌아갑니다. 【주제의 확장】을 통해 결점 없이 칼을 쓰는 일 즉 아라한에게는 자살이 허용됨을 설명하고, ‘이 세상도 없고 …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설명하였는데, 이 문장을 중유의 근거로 삼는 시도가 타당하지 않음 즉 중유 없음의 확인입니다.
(SN 35.87-찬나 경)과 같은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wr_id=56
심한 병에 걸린 찬나 존자를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가 문병하는 일화
1. 병문안을 가서 병의 상태를 묻는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에게 찬나 존자는 고통이 심하고 회복이 어려울 것 같아 칼을 써야겠다고 말함 ― ‘나는 칼을 써야겠습니다. 나는 생명을 바라지 않습니다.(satthaṃ, āvuso sāriputta, āharissāmi, nāvakaṅkhāmi jīvitan”ti.)’
2. 사리뿟따 존자가 칼을 쓰지 말고 회복해야 한다고 격려하지만, 찬나 존자는 ‘찬나 비구는 결점 없는 칼을 쓸 것이다.’라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함
3. 사리뿟따 존자는 (결점 없이 칼을 쓸 것을 검증하기 위해) 질문을 함
(질문 1)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고, 이것이 나의 아(我)다.’라고 봅니까?’(여섯에 반복)
(대답 1)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봅니다.’(여섯에 반복)
(질문 2)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실답게 알았기에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봅니까?’(여섯에 반복)
(대답 2)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에 대해 소멸을 보고 소멸을 실답게 알았기에 안(眼)과 안식(眼識) 그리고 안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봅니다.’(여섯에 반복)
4. 문답에 이어 마하쭌다 존자가 말함 ― “그러므로, 도반 찬나여, 이것도 그분 세존의 가르침이라고 늘 작의(作意) 해야 합니다. —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 떨림이 없을 때 진정이 있고, 진정이 있을 때 성향이 없다. 성향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고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라고.
5.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가 돌아가고 오래지 않아서 찬나 존자는 칼을 씀
6. 사리뿟따 존자와 부처님의 대화
(사리뿟따 존자) 부처님에게 와서 칼을 쓴 찬나 존자의 간 곳을 믈음
(부처님) 찬나 존자가 결점 없이 칼을 쓴다고 한 점을 상기시킴.
(사리뿟따 존자) 찬나 존자에게 친하고 우호적이지만 비난받는 가문이 있다는 점을 (결점이라고) 지적
(부처님) 결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몸을 내려놓고 다른 몸을 붙잡는 것인데, 찬나 비구에게는 그런 결점이 없으므로 찬나 비구는 결점 없이 칼을 쓴 것이라고 알려줌 ― 「찬나 비구 = 아라한」 → 칼을 쓸 자격 있음
【주제의 확장】
1. satthaṃ āharati 칼을 쓰다 → anupavajjaṃ satthaṃ āharati 결점 없이 칼을 쓰다 = 아라한에게는 자살이 허용됨
1) (MN 144-찬나 가르침 경)/(SN 35.87-찬나 경) ― satthaṃ āharesi(칼을 썼다)/anupavajjaṃ satthaṃ āharissati(결점 없이 칼을 쓸 것이다)/satthaṃ āharitaṃ(칼을 썼음)
2) (SN 4.23-고디까 경) ― satthaṃ āhareyyan(칼을 써야겠다)/satthaṃ āharitaṃ(칼을 썼음)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1_04&wr_id=11
; 일곱 번째 일시적 심해탈을 얻은 고디까 존자가 여섯 번째까지도 일시적 심해탈을 유지하지 못한 것 때문에 칼을 쓰고자 하고, 이 생각을 안 마라 빠삐만뜨가 부처님에게 와서 ‘의(意)를 성취하지 못한 유학(有學)이면서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함. 고디까 존자는 칼을 썼고, 부처님은 일곱 번째 일시적 심해탈을 유지한 채 칼을 쓴 고디까 존자는 완전히 꺼졌다고 말하여 아라한을 성취하여 결점 없이 칼을 쓴 것이라고 설명함. → 마라 빠삐만뜨는 ‘고디까의 식(識)은 어디에 머물렀는가(‘kattha godhikassa kulaputtassa 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n’t)?’라고 고디까 존자의 식(識)을 찾아 헤메지만, 부처님은 ‘식(識)이 머물지 않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는 완전히 꺼졌다( appatiṭṭhitena ca, bhikkhave, viññāṇena godhiko kulaputto parinibbuto)’라고 말하여 고디까 존자가 아라한을 성취한 것을 설명함.
; 아라한에게는 자살이 허용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일화
; 일곱 번째 일시적 심해탈을 얻은 고디까 존자의 죽음이 결점 없는 죽음이라는 사실에서 고디까 존자는 해탈(解脫)하였지만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없었던 것이 아닌지 말하였는데, 해탈과 해탈지견의 경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경우라고 이해하였습니다.
3) (SN 22.87-왁깔리 경) ― satthaṃ āharesi(칼을 썼다)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74
; 심한 병에 걸린 왁칼리 존자는 ‘색(色)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을 저는 불확실해하지 않습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에 대해 찬다나 탐(貪)이나 사랑이 저에게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오온에 반복)라고 부처님에게 전해달라고 말한 뒤 칼을 씀
4) (SN 54.9-웨살리 경) ― satthaṃ āharanti(칼을 쓰다-pl.)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7_11_01&wr_id=8
※ pārājikakaṇḍaṃ, 3. tatiyapārājikaṃ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2_01_04&wr_id=1
; 부정(不淨)의 수행을 하며 머무는 비구들이 몸에 대해 걱정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여 칼을 쓰는 자를 구함 → 하루에 열 명의 비구가 칼을 쓰기도 하고 … 스무 명의 … 서른 명이 비구가 칼을 쓰기도 함 → (아난다 존자) ‘세존께서 비구 상가가 무위(無爲)의 앎을 위해 지속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 부처님이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의 삼매(ānāpānassatisamādhi)를 닦고 많이 행할 것을 가르침
2. nissitassa calitaṃ, anissitassa calitaṃ natthi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 ― (MN 144-찬나 가르침 경)/(SN 35.87-찬나 경)
※ (KN 5.38-두 가지 관찰 경)
(13) “siyā aññenapi ... pe ... kathañca siyā? nissitassa calitaṃ hotīti, ayamekānupassanā. anissito na calatīti, ayaṃ dutiyānupassanā. evaṃ sammā ... pe ... athāparaṃ etadavoca satthā —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57. “anissito na calati, nissito ca upādiyaṃ.
itthabhāvaññathābhāv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의지하지 않는 자는 떨지 않고, 의지하는 자는 여기의 존재와 다른 존재를 집착한다.
윤회를 넘어서지 못한다.
758. “etamādīnavaṃ ñatvā, nissayesu mahabbhayaṃ.
anissito anupādāno, sato bhikkhu paribbaje”ti.
의지하는 것에 큰 두려움이 있다는 이런 위험을 알고서
비구는 의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위해 사띠를 갖추어 유행해야 한다.
3.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고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 ― (MN 144-찬나 가르침 경)/(SN 35.87-찬나 경)/(SN 35.95-말루꺄뿟따 경)
이 문장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에 의해 중유(中有)-중음신(中陰身)의 근거로 사용되는데, 타당한 적용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1&wr_id=111&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1&wr_id=100참조
1) (MN 144-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SN 35.87-찬나 경) ―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 떨림이 없을 때 진정이 있고, 진정이 있을 때 성향이 없다. 성향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고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
“여기서,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닿아 알고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에서 보일 때는 단지 보임만이 있을 것이고, 들릴 때는 단지 들림만이 있을 것이고, 닿아 알 때는 단지 닿아 앎만이 있을 것이고, 인식될 때는 단지 인식됨만이 있을 것이다.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닿아 알고 인식되어야 하는 법들에서 보일 때는 단지 보임만이 있고, 들릴 때는 단지 들림만이 있고, 닿아 알 때는 단지 닿아 앎만이 있고, 인식될 때는 단지 인식됨만이 있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해’가 없을 것이다.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해’가 없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없다. 말루까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없을 때, 말루꺄뿟따여, 그대는 이 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저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둘의 중간에 의해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 ‘보일 때는 단지 보임만이 있을 것’ ― 내입처와 외입처라는 삶의 골격 위에 공동주관인 욕탐(欲貪)의 참여에 의한 탐-진-치의 작용을 배제한 상태
→ ‘그것에 의해’가 없을 것 ― 탐-진-치의 참여에 의해 내입처에서의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와 외입처에서 상(相-nimitta)을 만드는 작용이 배제되어 사실 그대로 인식함
→ ‘거기에’가 없다 ― 탐-진-치의 영역 즉 ‘중생들의 세상에’가 없다
→ 이 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저세상에 의해서도 없고, 둘의 중간에 의해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