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channasuttaṃ (SN 22.90-찬나 경)
9. theravaggo, 8. channasuttaṃ (SN 22.90-찬나 경)
한때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 공원에 머물렀다. 그런데 저녁때 홀로 머묾에서 나온 찬나 비구가 열쇠를 가지고 거처에서 거처로 다니면서 장로 비구들에게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비구들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도반 찬나여,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수(受)는 무상(無常)하고, 상(想)은 무상(無常)하고, 행(行)들은 무상하고, 식(識)은 무상(無常)합니다. 색(色)은 무아(無我)이고,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무아(無我)입니다.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법(法)은 무아(無我)입니다[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ㅡ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ㅡ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수(受)는 무상(無常)하고, 상(想)은 무상(無常)하고, 행(行)들은 무상하고, 식(識)은 무상(無常)하다. 색(色)은 무아(無我)이고,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무아(無我)다.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법(法)은 무아(無我)다.’라고. 그런데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애(愛)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에 대해 나의 심(心)은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의(意)는 ‘그러면 이제 누가 나의 아(我)인가?’라고 다시 되돌아온다. 이런 법을 본 자에게는 그것이 없다. 누가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그때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ㅡ “스승의 칭찬을 받는 분이고,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의 존중을 받는 분인 아난다 존자가 꼬삼비의 고시따 사원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해 그런 믿음이 있다. 참으로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봐야겠다.”라고. 그래서 찬나 존자는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서 꼬삼비의 고시따 사원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찬나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도반 아난다여, 한때 저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 공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녁때 홀로 머묾에서 나온 저는 열쇠를 가지고 거처에서 거처로 다니면서 장로 비구들에게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비구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ㅡ ‘도반 찬나여,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무상하고, 식(識)은 무상(無常)합니다. 색(色)은 무아(無我)이고 … 식(識)은 무아(無我)입니다.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법(法)은 무아(無我)입니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ㅡ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ㅡ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 식(識)은 무상(無常)하다. 색(色)은 무아(無我)이고,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무아(無我)다.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법(法)은 무아(無我)다.’라고. 그런데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애(愛)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에 대해 나의 심(心)은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의(意)는 ‘그러면 이제 누가 나의 아(我)인가?’라고 다시 되돌아온다. 이런 법을 본 자에게는 그것이 없다. 누가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ㅡ ‘스승의 칭찬을 받는 분이고, 현명한 동료 수행자들의 존중을 받는 분인 아난다 존자가 꼬삼비의 고시따 사원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해 그런 믿음이 있다. 참으로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봐야겠다.’라고.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
“이 정도로도 우리는 찬나 존자에게 만족합니다. 참으로 찬나 존자는 [보지 못함을] 보여주었고, 방치(放置)하는 것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단지 그 정도로도 ‘참으로 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커다란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앞에 있던 깟짜나곳따 비구에게 설해진 이것을 세존의 앞에서 들었습니다. ㅡ 「깟짜나여, 세상은 대부분 ‘있음’과 ‘없음’이라는 쌍(雙)에 의지한다. 그러나 깟짜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없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있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은 주로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경향과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런 심(心)의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결정-경향-잠재성향에게 ‘나의 아(我)’라고 접근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일어나고 있는 괴로움은 일어난다. 소멸하고 있는 괴로움은 소멸한다.’라고 회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앎이 여기에 있다. 깟짜나여, 이런 점에서 바른 견해이다. 깟짜나여, ‘모든 것은 있다.’라는 것은 한끝이다. ‘모든 것은 없다.’라는 것은 두 번째 끝이다. 깟짜나여, 이런 두 끝에게 접근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ㅡ ‘무명(無明)의 조건으로부터 행(行)들이 있다. 행(行)의 조건으로부터 식(識)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남김없이 빛바랜 멸(滅)로부터 행멸(行滅)이 있다. 행멸(行滅)로부터 식멸(識滅)이 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라고.
“이렇게, 도반 아난다여,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동료 수행자인 존자들에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한 아난다 존자의 이 설법을 듣고서 저는 법을 이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