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takkī이자 vīmaṃsī의 방법과 부처님의 방법
【해설】
이렇게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지 못하는 범행이기 때문에 (DN 1-범망경)에 의하면,
1) 영속론자 ― 「‘sassato attā ca loko ca vañjho kūṭaṭṭho esikaṭṭhāyiṭṭhito; te ca sattā sandhāvanti saṃsaranti cavanti upapajjanti, atthitveva sassatisaman’ti.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2)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 ― 「‘yaṃ kho idaṃ vuccati cakkhuṃ itipi sotaṃ itipi ghānaṃ itipi jivhā itipi kāyo itipi, ayaṃ attā anicco addhuvo asassato vipariṇāmadhammo. yañca kho idaṃ vuccati cittanti vā manoti vā viññāṇanti vā ayaṃ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ī’ti. ‘안(眼)이라고도, 이(耳)라고도, 비(鼻)라고도, 설(舌)이라고도, 신(身)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我)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심(心)이라거나, 의(意)라거나, 식(識)이라고 불리는 이 아(我)는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영원히 그렇게 서 있다.’라고.」
3) 유한-무한에 속하고 유한-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 자 ― 「‘nevāyaṃ loko antavā, na panānanto.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māhaṃsu — “antavā ayaṃ loko parivaṭumo”ti, ‘이 세상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라고.」
4)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 ― 「‘adhiccasamuppanno attā ca loko cā’ti ‘아(我)와 세상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발생한다.’라고」
라는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야기합니다. 이런 견해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갈애 때문에 경험된 것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입니다. 촉(觸)을 조건으로 하고,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MN 76-산다까 경)에 의하면 사선(四禪)-삼명(三明)의 과정으로의 범행에 의한 것이고, (DN 1-범망경)에 의하면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줄어듦과 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성취됩니다.
이때, 딱까의 영역을 넘어서기 위해 여기에서의 조건성(條件性)인 연기(緣起)를 보고, 모든 행(行)들의 그침-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애(愛)의 부숨-이탐(離貪)-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을 보는 두 가지 토대를 말하는데(SN 6.1-범천의 요청 경), 수행의 구체적 기법으로는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법(法)의 위빳사나로 딱까에 접근하여 사마타-위빳사나로 딱까 내부에서 번뇌를 부수고 해탈하는 방법이 제시됩니다. → 「딱까 밖의 과정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로 그치게 하고 법(法)의 위빳사나로 관찰, 딱까 안의 과정 ― 사마타로 그치게 하고 위빳사나로 관찰」
그래서 이 과정은 딱까를 중심으로 안팎의 관찰을 동반하여 안팎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takkī이자 vīmaṃsī의 방법과 부처님의 깨달음의 방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 딱까를 두드림(takka-pariyāhata)의 pariyāhata의 의미가 부처님의 방법과 다른 경우
둘째, 방법은 같지만 딱까를 두드려 자신이 이해한(sayaṃpaṭibhāna) 정도의 차이 즉 딱까 내면을 완전히 보아서 무아(無我)를 선언하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완전히 보지 못해서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는 takkī이자 vīmaṃsī의 이해에 의한 잘못된 견해
입니다.
그런데 (MN 76-산다까 경)은 이 방법에 대해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확실한 범행을 실천하지 못하고, 범행을 실천하는 자도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방법에서 두드림(pariyāhata)의 의미가 딱까에 대한 부처님의 방법과 다르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의 차이에 의해 딱까의 안팎에 대한 바른 관찰을 하지 못하고, 아(我)를 전제한 관찰에 의해 깨달음으로 이끌리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MN 12-사자후 큰 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나에게 ‘사문 고따마에게는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知)와 견(見)이 없다. 사문 고따마는 관찰을 동반하여 딱까를 두드려 자신이 이해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심(心)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포기하지 않으면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라고 질타하면서, 계(戒)-정(定)-혜(慧)를 갖춘 비구가 지금여기에서 무위(無爲)의 앎을 얻는 성취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 pariyāhata: (pp. of pariyāhanati) struck out, affected with ( -- ˚), only in phrase takka˚
• pariyāhanati: strikes; knocks against.
또한,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부처님 당시에 이미 딱까라는 개념이 인도 철학계에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딱까라고 하는 내면의 과정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 내부를 정확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를 해소하여 깨달음에 닿을 수 없었는데, 부처님께서 팔정도(八正道)의 길과 실천에 의해 비로소 보아내고 해소하여 깨달음에 닿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의 불교계에는 딱까의 개념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데, 후대의 교재들에 의해 감춰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