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 27.12-처음에 대한 앎 경, 바라문 계급) aggaññasuttaṃ, brāhmaṇamaṇḍalaṃ
4. aggaññasuttaṃ, brāhmaṇamaṇḍalaṃ (DN 27.12-처음에 대한 앎 경, 바라문 계급)
그러자 와셋타여, 그 중생들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ㅡ ‘존자들이여, 악한 법들이 중생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비난이 나타날 것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몽둥이로 처벌하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을 나르게 하면[제거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그들은 악한 불선법들을 나르게[제거하게] 했다. ‘악한 불선법들을 나르게[제거하게] 한다.’라고 해서, 와셋타여, ‘바라문, 바라문’이라는 첫 번째 단어가 생겼다.
그들은 숲속에서 풀잎으로 된 오두막을 지은 뒤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선(禪)을 하였다. 그들은 숯불에서 벗어나고, 연기에서 벗어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 식사를 위하여, 아침에는 아침 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번화가와 수도로 가서 음식을 얻었다. 그들은 음식을 얻은 뒤 다시 숲속의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선(禪)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런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ㅡ '존자들이여. 숲속에서 풀잎으로 된 오두막을 지은 뒤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선(禪)을 합니다. 그들은 숯불에서 벗어나고, 연기에서 벗어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 식사를 위하여, 아침에는 아침 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번화가와 수도로 가서 음식을 얻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얻은 뒤 다시 숲속의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선(禪)을 합니다.'라고. ‘선(禪)을 한다.’라고 해서, 와셋타여, '선(禪)을 하는 자, 선(禪)을 하는 자'라는 두 번째 단어가 생겼다.
→ jhāyaka: one who meditates. (m.)
와셋타여, 그 중생들 가운데 어떤 중생들은 숲속의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그 선(禪)을 지속할 수 없어지자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 인간들은 이런 그들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ㅡ '이 중생들은 숲속의 풀잎으로 된 오두막에서 그 선(禪)을 지속할 수 없어지자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 이들은 이제 선(禪)을 하지 않는다.'라고. ‘이들은 이제 선(禪)을 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와셋타여, '선(禪)을 하지 않는 자, 선(禪)을 하지 않는 자(→ 베다를 공부하는 자)'라는 세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와셋타여, 이들은 그때는 저열한 것으로 간주 되었지만, 지금은 최상으로 간주 된다.
→ ajjhāyaka: an instructor; teacher. (m.), (a brahmin) engaged in learning the Veda
한편,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의 과정에 대해서는 숫따니빠따의 2. cūḷavaggo, 7. brāhmaṇadhammikasuttaṃ (KN 5.19)에서 설명됩니다. 전도된 견해가 생겨난 바라문들은 소들을 둘러싼 무리, 정복한 아름다운 여인들, 인간의 큰 재물을 간탐(慳貪) 하게 되고, 만뜨라들을 생각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사를 유도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와셋타여, 옛날, 최초에 대한 앎의 단어에 의해 그 중생들에게서 이 바라문 계급이 생겼다. 다른 것들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동등한 것들에게서 생겼지 동등하지 않은 것들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법(法)에 의해서 생겼지 비법(非法)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참으로, 와셋타여, 지금여기에도 미래에도 법을 가진 자가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