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ssatavādo (DN 1.6-범망경(梵網經), 영속론자)
1. brahmajālasuttaṃ sassatavādo (DN 1.6-범망경(梵網經), 영속론자)
비구들이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영속론자인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수백 번의 생, 수천 번의 생, 수십만 번의 생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ㅡ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수백 번의 생, 수천 번의 생, 수십만 번의 생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이런 나는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한 번의 진화와 퇴보, 두 번의 진화와 퇴보, 세 번의 진화와 퇴보, 네 번의 진화와 퇴보, 다섯 번의 진화와 퇴보, 열 번의 진화와 퇴보를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ㅡ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한 번의 진화와 퇴보, 두 번의 진화와 퇴보, 세 번의 진화와 퇴보, 네 번의 진화와 퇴보, 다섯 번의 진화와 퇴보, 열 번의 진화와 퇴보를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나는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이런 나는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세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열 번의 진화와 퇴보, 스무 번의 진화와 퇴보, 서른 번의 진화와 퇴보, 마흔 번의 진화와 퇴보를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ㅡ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ㅡ 열 번의 진화와 퇴보, 스무 번의 진화와 퇴보, 서른 번의 진화와 퇴보, 마흔 번의 진화와 퇴보를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나는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이런 나는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세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네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 자이다. 그는 딱까[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을 두드리고, 조사를 동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ㅡ ‘영원한 아(我)와 세상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네 번째 경우이다.
비구들이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영원한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이 네 가지 경우거나 이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 의한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ㅡ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딱까[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