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경전연구회 두 번째 홈페이지 「니까야 번역 불사 터(http://sutta.kr)」 제작 관련】
지난 삶의 누적된 결과로의 식(識)과 명색(名色)[명(名) ㅡ 수(受)-상(想)-사(思)-촉(觸)-작의(作意)]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해 생겨나는 ①나[오취온(五取蘊)]과 ②지금 삶의 동력으로의 촉(觸)과 작의(作意)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은 지난 삶의 누적이 가지는 활동성으로 지금 삶을 살고 지금 삶은 그 결과를 쌓아 누적된 삶을 바꿉니다[무아(無我)-연기(緣起)].
또한, 누적된 삶에 의해 새끼쳐진 식(識)이 두 번 몸집을 부풀려 갈애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식(識) → 심(心) → 애(愛)]. 이때, 갈애는 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라고 정의되는데, 특히 nandirāgasahagatā[nandi와 rāga가 함께한 것]이라는 정의는 우리 법회의 이런 설명에 타당성을 확인해줍니다.
삶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십이연기(十二緣起)의 행(行)을 심행(心行)에 대한 정의 중심으로 설명하였습니다. vibhaṅgasuttaṃ (SN 12.2)[분석 경]의 정의는 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과 dutiyakāmabhūsuttaṃ (SN 41.6)[까마부 경2]에서 설명됩니다. 그리고 붓다고사 스님은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인 멸희론소(滅戱論疏)[papañcasūdanī]에서 여기에 주석하였습니다.
행(行) 특히 심행(心行)은 삶의 중심인 심(心)을 정의하는 불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는 신중히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멸희론소(滅戱論疏)에 의한 붓다고사 스님의 해석은 부처님의 설명과 다릅니다. 위의 타당한 설명에 의하면, 상(想)과 수(受)의 과정이 진행되면 식(識)이 몸집을 부풀린 것으로의 심(心)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심행(心行)은 「상(想)과 수(受)에 의한 심(心)의 형성작용」입니다. 상(想)과 수(受)가 심(心)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붓다고사 스님은 심(心)에 의해서 상(想)과 수(受)가 형성되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삶의 중심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에 따라 불교 안에서 심(心)의 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부처님에 의해 분명히 정의된 심(心)이 붓다고사 스님에 의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오랜 세월 불교에는 삶에 대한 부처님의 이해[고(苦) → 십이연기(十二緣起)]와 삶의 문제의 해소에 대한 부처님의 안내[고멸(苦滅) → 팔정도(八正道)]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고(苦)와 고멸(苦滅)을 설하는 부처님의 완성된 의도가 알려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근본경전연구회는 「니까야로 니까야를 풀어 꿰는 기법」에 의해 심행(心行)의 정의에 대한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의 중심자리를 부처님의 의도를 적용해 다시 해석하였습니다. 삶의 메커니즘[십이연기(十二緣起) → 고(苦)]과 수행지도(修行地圖)[팔정도 → 고멸(苦滅)]이 새롭게 그려지고 부처님 가르침의 심오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불교에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없습니다. 다만,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삶의 깊은 영역은 심오한 것이어서 오직 부처님에 의해 알려져야 하는 것이고[개척된 깨달음 - 도관(導管)의 설치 – 법주(法洲)], 그렇게 설치된 도관(導管)을 따라 스스로 고멸(苦滅)을 실현하는 제자들의 삶[깨달음의 재현 – 자주(自洲)]가 있을 뿐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는 부처님 깨달음의 심오함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게 된 심오한 영역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에 의해 재현될 수 없는 낮은 깨달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붓다고사 스님 이래 1600년 만에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은 「심행(心行)=상(想)-수(受)」 즉 삶의 중심자리에 대한 부처님의 명확한 정의를 되살렸습니다. 불교 안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는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하신 바 그 심오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은혜로움 안에서 고멸(苦滅)의 삶을 실현해 가는 향상하는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이런 이유, 이런 필요성 때문에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은 두 번째 홈페이지 「니까야 번역 불사 터(니까야.org)」를 개설하였습니다. 10년을 목표로 하는, 부처님의 의도에 맞는 새로운 번역불사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의 몸통입니다.
※ 1. 「심행(心行) = 상(想)-수(受)에 대한 검토」를 아래에 게재하였습니다.
2.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가 바로 잡아져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차례3[대담 - 심의식 & 보편적 깨달음](기본기법회 180122)」에서 좀 더 상세히 정리하였습니다.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2&wr_id=39
3. 이 동영상의 끝에서 해피스님은 니까야 번역불사를 통해 공부의 길을 안내해주신 각묵 스님, 대림 스님, 전재성 박사님께 마치 스승과도 같은 고마움을 표하였습니다. 새로운 번역불사는 이 분들의 번역불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이 분들의 수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하여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진정한 불사(佛事)를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심행(心行) = 상(想)-수(受)」에 대한 검토 ● vibhaṅgasuttaṃ (SN 12.2)
“katame ca, bhikkhave, saṅkhārā? tayome, bhikkhave, saṅkhārā — 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 ime vuccanti, bhikkhave, saṅkhārā.
“비구들이여, 무엇이 행(行)들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행들이 있다. ㅡ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비구들이여, 이것들이 행(行)들이라고 불린다.”
● 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 중에서 ; cittasaṃyuttaṃ, 6. dutiyakāmabhūsuttaṃ (SN 41.6)에서도 동일하게 설명됨. “kati panāyye, saṅkhārā”ti?
“담마딘나 비구니여, 몇 개의 행(行)들이 있습니까?” “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 — 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이런 세 개의 행(行)들이 있습니다. ㅡ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katamo panāyye, kāyasaṅkhāro, katamo vacīsaṅkhāro, katamo cittasaṅkhāro”ti?
“비구니여, 무엇이 신행(身行)이고, 무엇이 구행(口行)이고, 무엇이 심행(心行)입니까?”“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saṅkhāro,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들숨-날숨들이 신행(身行)이고, 위따까-위짜라들이 구행(口行)이고, 상(想)들과 수(受)들이 심행(心行)입니다.”“kasmā panāyy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비구니여, 왜 들숨-날숨들이 신행(身行)이고, 왜 위따까-위짜라들이 구행(口行)이고, 왜 상(想)들과 수(受)들이 심행(心行)입니까?”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들인 들숨-날숨들인 이 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들이 신행(身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위딱까하고 위짜라 한 뒤에 나중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위딱까-위짜라가 구행(口行)입니다. 심(心)에 속한 것인 상(想)들과 수(受)들인 이 법들은 심(心)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상(想)들과 수(受)들이 심행(心行)입니다.”
● cūḷavedallasuttavaṇṇanā[교리문답의 작은 경 주석] ; Papancasudani <멸희론소> - 붓다고싸가 지은 맛지마니까야 주석서 tattha kāyapaṭibaddhattā kāyena saṅkharīyati karīyati nibbattīyatīti kāyasaṅkhāro. vācaṃ saṅkharoti karoti nibbattetīti vacīsaṅkhāro. cittapaṭibaddhattā cittena saṅkharīyati karīyati nibbattīyatīti cittasaṅkhāro. 거기서 신(身)에 묶여있음은 신(身)에 의해서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지고 생겨나진다고 해서 신행(身行)이다. 말을 형성하고 만들고 생겨나게 한다고 해서 구행(口行)이다. 심(心)에 묶여 있음은 심(心)에 의해서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지고 생겨나진다고 해서 심행(心行)이다.
● 붓다고사 스님과 해피 스님의 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