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accasassatavādo (DN 1.7-범망경(梵網經), 일부 영속론자)
1. brahmajālasuttaṃ, ekaccasassatavādo (DN 1.7-범망경(梵網經), 일부 영속론자)
비구들이여, 네 가지 경우로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에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줄어드는[진화] 때가 있다. 줄어드는[진화] 세상에서 대부분 중생은 광음천으로 이끌린다. 의성(意成)인 그들은 거기서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자라나는[퇴보] 때가 있다. 자라나는[퇴보] 세상에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에서 떨어져 비어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거기서 오랫동안 혼자 머무는 그에게 싫증과 동요가 생긴다. —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다른 중생들도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 그 중생의 동료로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들도 거기서 의성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그때, 비구들이여, 첫 번째로 태어난 그 중생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범천인 나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존재하거나 존재할 자들의 아버지이다. 나에 의해 이 중생들은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에게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이렇게 나의 의(意)의 지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중생들이 여기에 왔다.’라고.
나중에 태어난 그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참으로 범천인 이 존자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존재하거나 존재할 자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이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먼저 존재하는 이 존자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다.’라고.
거기서, 비구들이여,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용모가 더 뛰어나고, 더 큰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난 그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고, 용모가 더 못하고, 더 작은 위력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는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더 이전의)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범천인 그 존자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존재하거나 존재할 자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에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에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비구들이여,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신들이 있다. 그들은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문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그들에게 사띠는 잊힌다. 사띠의 혼란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다.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는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더 이전의)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 신 존자들은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하지 않다. 그들은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 그들에게 사띠는 잊히지 않는다. 사띠가 혼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우리는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문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우리에게 사띠는 잊힌다. 사띠의 혼란 때문에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에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세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에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비구들이여,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신들이 있다. 그들은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본다.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는 그들은 서로의 심(心)들을 불쾌하게 한다. 그들은 서로 간에 불쾌한 그 심(心)들 때문에 몸도 피로하고, 심(心)도 피로하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다.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는 심삼매(心三昧)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더 이전의)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 신 존자들은 거친 의(意)를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다.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 그들은 서로의 심(心)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에 불쾌하지 않은 그 심(心)들 때문에 몸도 피로하지 않고, 심(心)도 피로하지 않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거친 의(意)를 가진 우리는 장시간 서로 바라보았다. 장시간 서로 바라보는 우리는 서로의 심(心)들을 불쾌하게 했다. 그런 우리는 서로 간에 불쾌한 심(心)들 때문에 몸들도 피로했고, 심(心)들도 피로했다.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에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세 번째 경우이다.
그러면 네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에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 자이다. 그는 딱까[애(愛)의 형성 과정]를 두드리고, 조사를 동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 ‘안(眼)이라고도, 이(耳)라고도, 비(鼻)라고도, 설(舌)이라고도, 신(身)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我)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심(心)이라거나, 의(意)라거나, 식(識)이라고 불리는 이 아(我)는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영원히 그렇게 서 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에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네 번째 경우이다.
비구들이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네 가지 경우로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이 네 가지 경우거나 이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 의한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딱까[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