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rahmajālasuttaṃ, ucchedavādo (DN 1.15-범망경, 단멸을 말하는 자)
1. brahmajālasuttaṃ, ucchedavādo (DN 1.15-범망경, 단멸을 말하는 자)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단멸(斷滅)을 말하는데,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러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어떤 이유로, 무엇에 근거하여 단멸을 말하고,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존자여, 색(色)을 가졌고, 사대(四大)로 구성되었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이 아(我)는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하늘의 색(色)을 가졌고 소유의 영역[욕계(慾界)]이고 거친 음식을 먹는 다른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하늘의 색(色)을 가졌고 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완전하게 색상(色想)을 넘어서고, 저항의 상(想)이 줄어들고, 다양한 상(想)을 작의하지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에 도달한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에 도달한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식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에 도달한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무소유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다.’라며 비상비비상처에 도달한 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단멸을 말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단멸을 말하고,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7가지 기반에 의한 것이다. ... pe ...
…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여기의 밖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안다. ― ‘이렇게 붙잡고 이렇게 집착된 이 경우의 견해 때문에 이런 이끌림이 있고 이런 다시 태어남이 있다.’라고.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보다 더 높은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그 앎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