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rahmajālasuttaṃ, diṭṭhadhammanibbānavādo (DN 1.16-범망경,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
1. brahmajālasuttaṃ, diṭṭhadhammanibbānavādo (DN 1.16-범망경,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자)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데,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러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어떤 이유로, 무엇에 근거하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고,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존자여,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여된 것을 즐길 때, 이만큼 이 아(我)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我)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존자여, 소유의 삶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변하여 다른 것이 됨 그리고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이 생겨납니다. 존자여, 이 아(我)가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아(我)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我)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생각이 떠오르고 접근하는 것,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 존자여, 이 아(我)가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아(我)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我)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기쁨에 속하고 심(心)이 고양된 것,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 존자여, 이 아(我)가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아(我)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我)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나는 행복하다.‘라는 심(心)의 생각,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 존자여, 이 아(我)가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아(我)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고,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5가지 기반에 의한 것이다. ... pe ...
… (vatthūhi,) etesaṃ vā aññatarena; natthi ito bahiddhā.
…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여기의 밖은 없다.
“tayidaṃ, bhikkhave, tathāgato pajānāti — ‘ime diṭṭhiṭṭhānā evaṃgahitā evaṃparāmaṭṭhā evaṃgatikā bhavanti evaṃabhisamparāyā’ti. tañca tathāgato pajānāti, tato ca uttaritaraṃ pajānāti, tañca pajānanaṃ na parāmasati, aparāmasato cassa paccattaññeva nibbuti viditā.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bhikkhave, tathāgato.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안다. ― ‘이렇게 붙잡고 이렇게 집착된 이 경우의 견해 때문에 이런 이끌림이 있고 이런 다시 태어남이 있다.’라고.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보다 더 높은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그 앎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ime kho te, bhikkhave, dhammā gambhīrā duddasā duranubodhā santā paṇītā atakkāvacarā nipuṇā paṇḍitavedanīyā, ye tathāgato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ti, yehi tathāgatassa yathābhuccaṃ vaṇṇaṃ sammā vadamānā vadeyyuṃ.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4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44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 pe ...
… (vatthūhi,) etesaṃ vā aññatarena; natthi ito bahiddhā.
…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여기의 밖은 없다.
“tayidaṃ, bhikkhave, tathāgato pajānāti — ‘ime diṭṭhiṭṭhānā evaṃgahitā evaṃparāmaṭṭhā evaṃgatikā bhavanti evaṃabhisamparāyā’ti. tañca tathāgato pajānāti, tato ca uttaritaraṃ pajānāti, tañca pajānanaṃ na parāmasati, aparāmasato cassa paccattaññeva nibbuti viditā. ved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bhikkhave, tathāgato.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안다. ― ‘이렇게 붙잡고 이렇게 집착된 이 경우의 견해 때문에 이런 이끌림이 있고 이런 다시 태어남이 있다.’라고.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보다 더 높은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그 앎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ime kho te, bhikkhave, dhammā gambhīrā duddasā duranubodhā santā paṇītā atakkāvacarā nipuṇā paṇḍitavedanīyā, ye tathāgato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ti, yehi tathāgatassa yathābhuccaṃ vaṇṇaṃ sammā vadamānā vadeyyuṃ.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62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여기의 밖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안다. ― ‘이렇게 붙잡고 이렇게 집착된 이 경우의 견해 때문에 이런 이끌림이 있고 이런 다시 태어남이 있다.’라고.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보다 더 높은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그 앎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