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mahāsīhanādasuttaṃ, tapopakkamaniratthakathā (DN 8.5-사자후 큰 경, 고행의 실…
8. mahāsīhanādasuttaṃ, tapopakkamaniratthakathā (DN 8.5-사자후 큰 경, 고행의 실천이 무익함에 관한 이야기)
만약, 깟사빠여, 「나체로 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먹고, ‘오시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고, ‘서시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고, 주어지지 않은 것과 배당되지 않은 것과 초대되지 않은 것을 받지 않습니다. 항아리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그릇의 가장자리로부터 받지 않고, 중간에 문지방이 있는 것, 중간에 몽둥이가 있는 것, 중간에 절굿공이가 있는 것, 두 사람이 먹고 있는 것, 임신부의 것, 젖을 먹이는 여자의 것, 남자에게 안긴 여자의 것을 받지 않고 모여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개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파리 떼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받지 않고, 어류를 받지 않고, 고기를 받지 않고, 술과 발효주와 발효하여 끓인 것을 마시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한 입의 음식을, 두 집에서 두 입의 음식을 … 일곱 집에서 일곱 입의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작은 그릇 한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작은 그릇 두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 작은 그릇 일곱 개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고, … 이레에 한 번 음식을 먹습니다.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뭅니다.」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戒)의 갖춤과 심(心)의 갖춤과 혜(慧)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생쌀을 먹기도 하고, 부드러운 뼈를 먹기도 하고, 수초를 먹기도 하고, 왕겨를 먹기도 하고, 뜨물을 먹기도 하고, 참깨가루를 먹기도 하고, 풀을 먹기도 하고, 쇠똥을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합니다.」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戒)의 갖춤과 심(心)의 갖춤과 혜(慧)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수의(壽衣)도 입고, 분소의(糞掃衣)도 입고, 나무껍질을 엮은 옷도 입고, 치타 가죽옷도 입고, 치타 가죽 망토도 입고, 꾸사 풀 옷도 입고, 나무껍질 옷도 입고, 나무의 편편한 조각으로 만든 옷도 입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도 입고, 뱀 껍질로 만든 담요도 입고, 올빼미 깃털로 만든 옷도 입습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뽑는 수행을 실천하는 자여서 머리카락과 턱수염도 뽑고, 앉는 것을 거부하는 자여서 똑바로 서기도 하고, 쪼그려 앉는 정진을 실천하는 자여서 쪼그려 앉기도 하고, 가시에 기대는 자여서 가시로 된 침대를 사용합니다.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뭅니다.」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戒)의 갖춤과 심(心)의 갖춤과 혜(慧)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 수행자 깟사빠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마 존자여,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깟사빠여, 「나체로 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나체로 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 수행자 깟사빠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마 존자여,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만약, 깟사빠여, 「나체로 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나체로 살고, 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받은 뒤에 핥아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아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고 아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삼베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저녁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고 아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심(慈心)을 닦고,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