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yo attapaṭilābhā (DN 9.7-뽓타빠다 경, 세 가지 아(我)를 얻음)
9. poṭṭhapādasuttaṃ, tayo attapaṭilābhā (DN 9.7-뽓타빠다 경, 세 가지 아(我)를 얻음)
“뽓타빠다여, 이런 세 가지 아(我)를 얻음이 있는데, 거친 아(我)를 얻음, 의성(意成)의 아(我)를 얻음, 무색(無色)의 아(我)를 얻음입니다. 그러면 뽓타빠다여, 무엇이 거친 아를 얻음입니까? 색(色)을 지녔고, 사대(四大)로 구성되었고, 덩어리진 자량을 먹는 이것이 거친 아를 얻음입니다. 무엇이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까? 색을 가졌고 의성(意成)이고[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이것이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다. 무엇이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까? 무색을 지녔고, 상성(想成)인[상(想)으로 만든] 이것이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다.
뽓타빠다여, 나는 거친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진정과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뽓타빠다여, 나는 의성의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진정과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뽓타빠다여, 나는 무색의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진정과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의성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무색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대덕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뽓타빠다여, 어떤 사람이 건물을 오르기 위해서 그 건물의 밑에서 사다리를 만들 것입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여보시오. 오르기 위해서 그대가 사다리를 만들고 있는 그 건물에 대해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높은지, 낮은지, 중간인지 그대는 압니까?’라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오르기 위해서 그 건물의 밑에서 내가 사다리를 만들고 있는 그 건물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대덕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의성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무색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대덕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은 헛되고, 무색의 아를 얻음은 헛됩니다. 오직 거친 아를 얻음만이 진실됩니다. 대덕이시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은 헛되고, 무색의 아를 얻음은 헛됩니다.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만이 진실됩니다. 대덕이시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은 헛되고, 의성의 아를 얻음은 헛됩니다.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만이 진실됩니다.”
”찟따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만약 그대에게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이렇게 질문한다면, 찟따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면, 대덕이시여,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저는 과거에 존재했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찟따여, 만약 그대에게 ‘아를 얻음이 있던 과거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미래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까? 아를 얻음이 있을 미래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까? 아를 얻음이 있는 지금 현재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미래도 헛됩니까?’라고 질문하면, 찟따여,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아를 얻음이 있던 과거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미래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까? 아를 얻음이 있을 미래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까? 아를 얻음이 있는 지금 현재의 그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미래도 헛됩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덕이시여,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아를 얻음이 있던 과거의 저에게 그 아(我)의 획득은 진실되지만 미래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다. 아를 얻음이 있을 미래의 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현재도 헛됩니다. 아를 얻음이 있는 지금 현재의 저에게 그 아를 얻음은 진실되지만 과거는 헛되고 미래도 헛됩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처럼, 찟따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찟따여,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가 됩니다. 우유가 있을 때는 응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응유가 되었을 때는 … 생 버터가 되었을 때는 … 정제된 버터가 되었을 때는 … 최상의 버터가 되었을 때는 우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응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처럼, 찟따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것들이, 찟따여, 세상의 명칭이고, 세상의 언어이고, 세상의 삶이고, 세상의 개념입니다. 그것들에 의해서 여래는 집착 없이 설명합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뽓타빠다 유행승이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예를 들면, 대덕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저는 의지처인 세존(世尊)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세존(世尊)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