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hiccasuttaṃ, tayo codanārahā (DN 12.3-로힛짜 경, 세 가지 질책 받을만한 스승)
12. lohiccasuttaṃ, tayo codanārahā (DN 12.3-로힛짜 경, 세 가지 질책 받을만한 스승)
로힛짜여, 세상에서 질책 받을만한 세 가지 스승이 있다. 이런 스승들을 질책하는 그런 질책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이고, 법다운 것이고, 결점이 없는 것이다. 어떤 셋인가?
여기, 로힛짜여, 어떤 스승은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런 그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 채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배우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난다.
그는 이렇게 질책되어야 한다. ㅡ ‘존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 채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런 그대의 제자들은 배우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하지 않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난다. 예를 들면, 돌아선 여인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다른 곳을 보는 여인을 안으려할 것이다. 이런 악(惡)한 탐법(貪法)[탐(貪)과 함께한 행위 → 십악업(十惡業)]이 이렇게 얻어진다고 나는 말한다. ㅡ 남이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이것이, 로힛짜여, 세상에서 질책 받을만한 첫 번째 스승이다. 이런 스승을 질책하는 그런 질책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이고, 법다운 것이고, 결점이 없는 것이다.
다시, 로힛짜여, 여기 어떤 스승은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런 그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 채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배우고, 귀를 기울이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질책되어야 한다. ㅡ ‘존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하지 못한 채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런 그대의 제자들은 배우고, 귀를 기울이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자기에게 적당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잠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악(惡)한 탐법(貪法)[탐(貪)과 함께한 행위 → 십악업(十惡業)]이 이렇게 얻어진다고 나는 말한다. ㅡ 남이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로힛짜여, 세상에서 질책 받을만한 두 번째 스승이다. 이런 스승을 질책하는 그런 질책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이고, 법다운 것이고, 결점이 없는 것이다.
다시, 로힛짜여, 여기 어떤 스승은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그는 사문됨을 성취한다. 그런 그는 사문됨을 성취한 뒤에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배우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난다.
그는 이렇게 질책되어야 한다. ㅡ ‘존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했다. 그런 그대는 사문됨을 성취한 뒤에 제자들에게 법을 설한다. ㅡ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런 그대의 제자들은 배우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으로 심(心)을 확고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되돌려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난다. 예를 들면, 앞에 있던 속박을 자른 뒤에 새로운 다른 속박을 만들 것이다. 이런 악(惡)한 탐법(貪法)[탐(貪)과 함께한 행위 → 십악업(十惡業)]이 이렇게 얻어진다고 나는 말한다. ㅡ 남이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로힛짜여, 세상에서 질책 받을만한 세 번째 스승이다. 이런 스승을 질책하는 그런 질책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이고, 법다운 것이고, 결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로힛짜여, 세상에서 질책 받을만한 세 가지 스승이다. 이런 스승들을 질책하는 그런 질책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이고, 법다운 것이고, 결점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