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mahānidānasuttaṃ, satta viññāṇaṭṭhiti (DN 15.5-일곱 가지 식(識)이 머무는 자리)
2. mahānidānasuttaṃ, satta viññāṇaṭṭhiti (DN 15.5-일곱 가지 식(識)이 머무는 자리)
“아난다여, 일곱 가지 식(識)이 머무는 자리와 두 가지 처(處)가 있다. 어떤 일곱 가지인가? 아난다여, 다양한 몸과 다양한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인간들, 어떤 신(神)들, 어떤 벌 받는 상태에 태어난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다양한 몸과 통일된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초선(初禪)에 의해 태어나는 범신천(梵身天)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통일된 몸과 다양한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광음천(光音天)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통일된 몸과 통일된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색상(色想)들의 완전한 초월로부터, 저항의 상(想)들의 줄어듦으로부터, 다양함의 상(想)들을 작의하지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에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에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 그리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두 번째이다.
거기서 아난다여, 다양한 몸과 다양한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인간들, 어떤 신(神)들, 어떤 벌 받는 상태에 태어난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식(識)이 머무는 자리이다. 아난다여, 그것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줄어듦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매력(魅力)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해방(解放)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 “거기서, 아난다여, 이것이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다. 아난다여, 그것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줄어듦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매력(魅力)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해방(解放)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거기서, 아난다여, 이것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아난다여, 그것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줄어듦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매력(魅力)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해방(解放)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아난다여, 비구가 이런 일곱 가지 식(識)이 머무는 자리와 이런 두 가지 처(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할 때, 이것이, 아난다여, 혜해탈자(慧解脫者)인 비구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