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samanupassanā (DN 15.4-대인연경(大因緣經), 아(我)의 관찰) 121-126.
2. mahānidānasuttaṃ, attasamanupassanā (DN 15.4-대인연경(大因緣經), 아(我)의 관찰) 121-126.
“아난다여, 아(我)를 관찰하는 자는 어떻게 관찰하는가? 아난다여, 수(受)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자는 ‘수(受)는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한다.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아(我)를 관찰하는 자는 이렇게 관찰한다.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아(我)다.’라고, 아난다여, 아(我)를 관찰하는 자는 이렇게 관찰한다.
거기서, 아난다여, ‘수(受)는 나의 아(我)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ㅡ ‘도반이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ㅡ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 그대는 이 세 가지 느낌들 가운데 어떤 것을 아(我)로부터 관찰합니까?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즐거운 느낌만 경험한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괴로운 느낌만 경험한다.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 경험한다.
즐거운 느낌도, 아난다여,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고 부서짐의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이탐(離貪)의 법이고 소멸(消滅)의 법이다. 괴로운 느낌, 아난다여,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고 부서짐의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이탐(離貪)의 법이고 소멸(消滅)의 법이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아난다여,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고 부서짐의 법이고 사라짐의 법이고 이탐(離貪)의 법이고 소멸(消滅)의 법이다.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즐거운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아(我)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괴로운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아(我)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소멸로부터 ‘나의 아(我)는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수(受)는 나의 아(我)다.’라고 말하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무상(無常)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있고 생기고 사라지는 법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자로서 관찰한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수(受)는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거기서 아난다여,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ㅡ ‘그러면 도반이여, 경험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이것이 나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아닙니다, 대덕이시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거기서 아난다여,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아(我)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ㅡ ‘그런데 도반이여, 만약 수(受)가 모든 것에 의해서 모두 것에게,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에게 남김없이 소멸한다면, 수(受)가 완전하게 없을 때 수(受)의 소멸로부터 거기에서 ‘이것이 나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아닙니다, 대덕이시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의 수(受)는 아(我)가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의 아(我)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옳지 않다.
아난다여, 비구가 ‘수(受)는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지 않고, 경험되지 않는 아(我)를 관찰하지도 않고, ‘나의 아(我)는 경험된다. 경험되는 것이 나의 아(我)다.’라고도 관찰하지 않을 때, 이렇게 관찰하지 않는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완전히 열반한다. ㅡ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 해탈된 심(心)을 가진 비구에게 어떤 사람이 ‘그는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는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를 가졌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이름까지, 이름의 범위까지, 언어까지, 언어의 범위까지, 개념까지, 개념의 범위까지, 지혜까지, 지혜의 영역까지, 윤회의 범위까지, 비구는 그것들에 대해 실다운 지혜에 의해서 해탈했다. 그것들에 대해 실다운 지혜에 의해서 해탈한 비구에게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