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거울[법경(法鏡)]] dhammādāsadhammapariyāyā (DN 16.11) ㅡ> 가르침의 근본[염(念)…
3. mahāparinibbānasuttaṃ, dhammādāsadhammapariyāyā (DN 16.11-법의 거울의 법문)
1) 법의 거울[법경(法鏡)]에 대한 법문
아난다여,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죽을 때마다 그대들이 여래를 찾아와서 이러한 뜻을 묻고자 한다면, 아난다여, 여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법의 거울[법경(法鏡)]이라고 불리는 법문을 설할 것이니 이것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원할 때면 오직 자신에 의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 ‘나에게 지옥은 다했고 축생의 모태는 다했고 아귀의 영역은 다했고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는 다했다. 나는 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그 법의 거울[법경(法鏡)]이라고 불리는 법문이어서 이것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원할 때면 오직 자신에 의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가? ― ‘나에게 지옥은 다했고 축생의 모태는 다했고 아귀의 영역은 다했고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는 다했다. 나는 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그분, 세존은,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입니다.’라고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세존(世尊)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상가[승(僧)]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 ‘세존의 제자 상가는 잘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올곧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방법에 맞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가르침에 일치하게 실천한다. 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이 세존의 제자 상가이니,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결점이 없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지자들이 칭찬하고,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성자들이 지니는 계(戒)들을 갖춘다.
아난다여, 이것이 법의 거울[법경(法鏡)]이라고 불리는 법문이어서 이것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원할 때면 오직 자신에 의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 ‘나에게 지옥은 다했고 축생의 모태는 다했고 아귀의 영역은 다했고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는 다했다. 나는 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2) 법의 말씀 ㅡ [계→정→혜ㅡ[심(心)]→해탈]
나띠까의 벽돌집에 머물던 세존은 거기에서도 많은 비구에게 이러한 법의 말씀을 하였다. ―
「이렇게 계(戒)가 있고, 이렇게 삼매[정(定)]가 있고, 이렇게 지혜[혜(慧)]가 있다. 계(戒)를 완전히 닦은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삼매를 완전히 닦은 지혜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지혜를 완전히 닦은 심(心)은 번뇌들 즉 소유의 번뇌와 존재의 번뇌와 무명의 번뇌로부터 바르게 해탈한다.」라고.
7. 웨살리의 이야기
부처님의 만년의 기록은 웨살리에서 가장 풍성합니다. 이 기록에 포함된 단 한 번의 안거도 웨살리입니다.
웨살리에서의 일정은 다양합니다. [암바빨리의 망고 숲 → 암바빨리 기녀의 집 → 암바빨리의 망고 숲 → 벨루와가마 → 짜빨라 탑묘 → 큰 숲의 중각강당]의 자리를 옮겨 머물면서다양한 법을 설하는데, 그 중간에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를 지내기도 합니다.
1) 암바빨리의 망고 숲 ㅡ 가르침의 근본[사띠-삼빠자나[염(念)-정지(正知)]]
그때 세존은 나띠까에서 있을 만큼 머문 뒤,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 “오라, 아난다여, 우리는 웨살리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세존은 큰 비구 상가와 함께 웨살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세존은 웨살리의 암바빨리 숲에 머물렀다. 거기서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띠를 가진 자, 바른 앎[정지(正知)-옳고 그름의 판단]을 가진 자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을 위한 우리의 이어지는 가르침(가르침의 근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사띠를 가진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身)에서 몸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느낌(受)들에서 느낌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마음(心)에서 마음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현상(法)들에서 현상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띠를 가진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바른 앎을 가진 자인가?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대가사와 발우와 가사를 지닐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똥과 오줌을 눌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갈 때도-설 때도-앉을 때도-잠잘 때도-깨어있을 때도-말할 때도-침묵할 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바른 앎을 가진 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띠를 가진 자, 바른 앎[정지(正知)-옳고 그름의 판단]을 가진 자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을 위한 우리의 이어지는 가르침(가르침의 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