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권 없음 & 자주-법주] veḷuvagāmavassūpagamanaṃ (DN 16.13)
4) 웰루와가마의 이야기
암바빨리 숲에서 웰루와가마로 자리를 옮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웨살리 전역에서 흩어져 안거를 하라고 하며 자신은 웰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웰루와가마는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지가 됩니다.
안거 중에 부처님은 큰 병을 앓고 회복합니다.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서 아무런 분부 없이 반열반하지 않을 것이어서 안심했다고 할 때 부처님은 사권(師拳) 없음의 법문을 설합니다. 마지막까지 움켜쥔 최후의 가르침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주(自洲)-법주(法洲)의 법문을 설합니다. 법에 의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향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때 세존은 암바빨리 숲에서 있을 만큼 머문 뒤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ㅡ “오라, 아난다여, 우리는 웰루와가마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세존은 많은 비구 상가와 함께 웰루와가마에 도착했다. 거기서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ㅡ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벗을 따르거나 견해가 같은 자를 따르거나 헌신적인 자를 따라서 웨살리 일대에서 안거를 하라. 나는 여기 웰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세존에게 대답한 뒤 비구들은 벗을 따르거나 견해가 같은 자를 따르거나 헌신적인 자를 따라서 웨살리 일대에서 안거를 하였다. 세존도 거기 웰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했다.
그런데 세존은 안거 도중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을 듯이 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나 세존은 사띠-삼빠자나[염(念)-정지(正知)] 하면서 고통의 경험을 참아냈다. 그때 세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ㅡ “내가 따르는 자들을 부르지도 않고, 비구 상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 병을 정진으로 극복하고 생명의 형성작용을 확고히 하여 머물러야겠다.” 그리고 세존은 그 병을 정진으로 극복하고 생명의 형성작용을 확고히 하여 머물렀다. 그래서 세존은 그 병을 진정시켰다. 세존은 병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곧 병실에서 나와 사원의 그늘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의 편안한 모습을 뵈었습니다. 대덕이시여, 제가 세존의 인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대덕이시여, 저의 몸은 무력하고 유연하지 못했으며 저에게 방향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의 병 때문에 법들도 저에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세존께서 비구 상가에 대해 어떤 말씀도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지는 않으실 것이다.’라는 어떤 안심이 있었습니다.”
“아난다여, 그런데 비구 상가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바라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없이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여, 여래의 법들에는 스승만의 특별한 앎[사권(師拳)]이 없다. 아난다여, 참으로 ‘나는 비구 상가를 보호한다.’거나 ‘비구 상가는 나의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비구 상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상가를 보호한다.’거나 ‘비구 상가는 나의 지시를 받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 상가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아난다여, 이제 나는 쇠해서 늙고 노년이고, 긴 세월을 살았고 사라질 때가 되었다.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여래의 몸도 가죽끈에 묶여서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아난다여, 여래가 모든 상(相)을 작의(作意)하지 않아 어떤 경험들의 소멸로부터 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에 들어 머물 때, 아난다여, 여래의 몸은 편안함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신(身)에서 신(身)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할 것이다. 수(受)에서 … 심(心)에서 … 법(法)에서 법(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할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은 뒤에라도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를 즐기는 비구들이 나에게 최고의 제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