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념처 - 진리 - 고멸도성제] maggasaccaniddeso (DN 22.18)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인가? 오직 이것,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道)[팔정도(八正道)]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견(正見-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고(苦)]에 대한 앎, 괴로움의 자라남[고집(苦集)]에 대한 앎, 괴로움의 소멸[고멸(苦滅)]에 대한 앎,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고멸도(苦滅道)]에 대한 앎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사유(正思惟-바른 사유)인가? 비구들이여, 출리(出離)의 사유, 분노하지 않는 사유, 비폭력의 사유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사유(正思惟)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어(正語-바른말)인가? 비구들이여,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삼가고, 험담하는 행위를 삼가고, 거칠게 말하는 행위를 삼가고,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어(正語)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업(正業-바른 행위)인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삼가고, 음행(淫行)에 대한 삿된 행위를 삼가는 것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업(正業)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명(正命-바른 생활)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들은 삿된 생활을 버리고, 바른 생활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명(正命)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心)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악한 불선법들이 버려지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心)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나지 않은 선법들이 생겨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心)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선법들이 유지되고, 혼란스럽지 않게 되고, 점점 더 커져서 가득 차게 되고, 닦아서 완성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心)을 돌보고, 애쓴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정진(正精進)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념(正念-바른 사띠)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身)에서 몸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느낌(受)들에서 느낌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마음(心)에서 마음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법(法)들에서 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세상에서 간탐과 고뇌를 제거한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념(正念)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정(正定-바른 삼매)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정(正定)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라고 불린다.
이렇게 현상들에서 현상을 이어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현상들에서 현상을 이어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현상들에서 현상을 이어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자라나는 법을 이어 보면서 현상에 머물거나, 무너지는 법을 이어 보면서 현상에 머물거나, 자라나고 무너지는 법을 이어 보면서 현상에 머문다. 또는 오직 앎[지(知)]만이 있고 밀착된 사띠만이 있을 때까지, ‘현상이 있다!’라고 사띠를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사성제의 현상들에서 현상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四念處)를 이렇게 칠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無爲)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不還者)의 상태[불환과(不還果)]이다.
칠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육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無爲)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不還者)의 상태이다.
육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오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오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사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사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삼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삼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이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이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일 년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일 년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일곱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일곱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여섯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無爲)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不還者)의 상태이다.
여섯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다섯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다섯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넉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넉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석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석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두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두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한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한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반 달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반 달은 그만두어라,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렇게 칠 일을 닦는 사람에게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기대된다. —지금 여기서 무위의 앎이 있거나, 집착이 남아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이다.
‘비구들이여, 사념처(四念處)라는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의 줄어듦을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경로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하였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