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gaññapaññattikathā (DN 24.6-처음에 대한 앎의 선언 이야기)
1. pāthikasuttaṃ, aggaññapaññattikathā (DN 24.6-처음에 대한 앎의 선언 이야기)
“박가와여, 나는 처음에 대한 앎도 꿰뚫어 압니다.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압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집니다. 실답게 아는 것에 의해 여래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스승에게서 배운바 권능 가진 자, 범천(梵天)에 의해 창조된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대 존자들이 스승에게서 배운바 권능 가진 자, 범천(梵天)에 의해 창조된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그러면 이런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예’라고 인정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배운바 권능 가진 자, 범천(梵天)에 의해 창조된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그들은 나에게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ㅡ
‘도반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줄어드는[진화] 때가 있습니다. 줄어드는[진화] 세상에서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으로 이끌립니다. 의성(意成)인 그들은 거기서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자라나는[퇴보] 때가 있습니다. 자라나는[퇴보] 세상에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이 나타납니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에 태어납니다. 그는 거기서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뭅니다.
거기서 오랫동안 혼자 머무는 그에게 싫증과 동요가 생깁니다. ㅡ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다른 중생들도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그 중생의 동료로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에 태어납니다. 그들도 거기서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뭅니다.
그때, 도반들이여, 첫 번째로 태어난 그 중생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ㅡ ‘범천(梵天)인 나는 대범천(大梵天),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이다. 나에 의해 이 중생들은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에게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ㅡ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이렇게 나의 의(意)의 지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중생들이 여기에 왔다.’라고.
나중에 태어난 그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ㅡ ‘참으로 범천(梵天)인 이 존자는 대범천(大梵天),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이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먼저 존재하고 있는 이 존자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다.’라고.
거기서, 도반들이여,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용모가 더 뛰어나고, 더 큰 위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난 그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고, 용모가 더 못하고, 더 작은 위력을 가졌습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금생(今生)]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더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범천(梵天)인 그 존자는 대범천(大梵天), 정복자, 정복당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그대 존자들은 스승에게서 배운바 권능 가진 자, 범천(梵天)에 의해 창조된 처음에 대한 앎을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ㅡ ‘도반 고따마여, 고따마 존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박가와여, 나는 처음에 대한 앎도 꿰뚫어 압니다.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압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집니다. 실답게 아는 것에 의해 여래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스승에게서 배운바,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대 존자들이 스승에게서 배운바,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그러면 이런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예’라고 인정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배운바,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그들은 나에게 질문합니다. 질문 받은 나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ㅡ
도반들이여,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뭅니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그들에게 사띠는 잊어집니다. 사띠의 혼란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집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 신 존자들은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하지 않다. 그들은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 그들에게 사띠는 잊히지 않는다. 사띠가 혼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우리는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문다. 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우리에게 사띠는 잊힌다. 사띠의 혼란 때문에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그대 존자들은 스승에게서 배운바,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ㅡ ‘도반 고따마여, 고따마 존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박가와여, 나는 처음에 대한 앎도 꿰뚫어 압니다.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압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집니다. 실답게 아는 것에 의해 여래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스승에게서 배운바,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대 존자들이 스승에게서 배운바,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그러면 이런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예’라고 인정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배운바,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그들은 나에게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ㅡ
‘도반들이여,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봅니다.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는 그들에게 서로의 심(心)들은 불쾌해합니다. 그 서로 간에 불쾌해하는 심(心)들 때문에 몸들도 피로하고, 심(心)들도 피로합니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집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 신 존자들은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하지 않다. 그들은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다. 장시간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 그들에게 서로의 심(心)들은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 서로 간에 불쾌해하지 않는 심(心)들 때문에 몸도 피로하지 않고, 심(心)도 피로하지 않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우리는 장시간 서로 바라보았다. 장시간 서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서로의 심(心)들은 불쾌해했다. 그런 우리는 서로 간에 불쾌해하는 심(心)들 때문에 몸들도 피로하고, 심(心)들도 피로하다.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라고.
그대 존자들은 스승에게서 배운바, 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자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ㅡ ‘도반 고따마여, 고따마 존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박가와여, 나는 처음에 대한 앎도 꿰뚫어 압니다.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압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집니다. 실답게 아는 것에 의해 여래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스승에게서 배운바, 원인 없이 생겨남이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대 존자들이 스승에게서 배운바, 원인 없이 생겨남이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그러면 이런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예’라고 인정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그러면 그대 존자들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배운바, 원인 없이 생겨남이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합니까?’라고. 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그들은 나에게 질문합니다. 질문받은 나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ㅡ
46. ‘santāvuso, asaññasattā nāma devā. saññuppādā ca pana te devā tamhā kāyā cavanti.
‘도반들이여, 상(想)없는 중생이라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想)의 생기면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집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작의(作意)의 결과로 심(心)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상(想)의 생김을 기억하는 그런 심삼매(心三昧)를 얻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아(我)와 세상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나는 지금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상태로 전변(轉變)한 것이다.’라고.
그대 존자들은 스승에게서 배운바, 원인 없이 생겨남이라는 처음에 대한 앎을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ㅡ ‘도반 고따마여, 고따마 존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박가와여, 나는 처음에 대한 앎도 꿰뚫어 압니다.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꿰뚫어 압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집니다. 실답게 아는 것에 의해 여래는 불행을 겪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설법하는 나를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사실 아니고, 헛되고, 거짓말로, 사실과 다르게 비방한다. ㅡ ‘사문 고따마와 비구들은 틀렸다. 사문 고따마는 이렇게 말한다. ㅡ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때 모든 부정(不淨)을 꿰뚫어 안다.’라고. 그러나 박가와여, 나는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때 모든 부정(不淨)을 꿰뚫어 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박가와여, 참으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때는 오직 정(淨)을 꿰뚫어 안다.’라고.”
“대덕이시여, 그러면 세존과 비구들을 틀렸다고 받아들이는 그들이 틀렸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에 대해 ‘세존께서는 나를 위해 내가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수 있는 법을 설하실 수 있다.’라는 분명함이 있습니다.”
“박가와여, 다른 견해를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경향을 가진, 다른 방법으로 정진하는, 다른 스승에게서 온 그대가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무는 것은 어렵습니다. 박가와여, 그대는 오십시오. 나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그대는 잘 보호하십시오.”
“대덕이시여, 만약 다른 견해를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경향을 가진, 다른 방법으로 정진하는, 다른 스승에게서 온 제가 정(淨)의 해탈을 성취하여 머무는 것은 어렵다면, 대덕이시여, 세존에 대한 저의 믿음을 저는 잘 보호할 것입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박가와 곳따 유행승은 아주 기뻐서 세존의 말씀에 동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