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umbarikasuttaṃ (DN 25-우둠바리까 경)
2. udumbarikasuttaṃ (DN 25-우둠바리까 경)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2&wr_id=52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경은 세존이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 때의 일화입니다. 그때 우둠바리까의 유행승의 사원에 머물던 니그로다 유행승의 무리를 방문한 산다나 장자와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유치한 말(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7_13_01&wr_id=1참조)를 일삼는 유행승들에 비해 숲속 외딴 처소를 수용하는 세존을 찬탄하는 산다나 장자에게 니그로다 유행승은 이렇게 세존을 비방합니다.
“장자여,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누구와 함께 말합니까? 누구와 함께 토론합니까? 누구와 함께 지혜의 성취를 증득했습니까? 사문 고따마의 지혜는 빈 집에서 파괴되었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문 고따마는 함께 말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는 변두리에 변두리만을 다닙니다. 예를 들면, 변두리로 다니는 외눈인 소는 변두리에 변두리만을 다닙니다. 이처럼 사문 고따마의 지혜는 빈 집에서 파괴되었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문 고따마는 함께 말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는 변두리에 변두리만을 다닙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장자여, 사문 고따마가 이 모임에 온다면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그를 제쳐둘 것이고, 생각건대 우리들이 마치 빈 항아리와 같은 그를 방해할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하늘 귀의 능력으로 들은 세존이 그들의 가까이로 가자 그 유행승들은 세존이 그들에게로 오면 이렇게 질문을 하자고 합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에 의해 세존이 제자들을 지도하는, 그것에 의해 세존으로부터 지도받고 위안을 얻은 제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범행(梵行)의 시작을 약속하는 세존의 그 법은 무엇입니까?’
니그로다 유행승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은 세존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니그로다여, 그것에 의해 내가 제자들을 지도하는, 그것에 의해 나로부터 지도받고 위안을 얻은 제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범행(梵行)의 시작을 약속하는 나의 법은 다른 견해를 가졌고, 다른 믿음을 가졌고, 다른 경향을 가졌고, 다른 노력을 가졌고, 다른 스승을 가진 그대에 의해서는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니그로다여, 그러니 그대는 나에게 그대의 스승에게서 전승된 강하고 신중한 관심에 대한 질문을 하십시오. ㅡ ‘대덕이시여, 어떻게 고행에 의한 혐오가 완성됩니까? 어떻게 완성되지 않습니까?’라고.”
유행승들은 세존이 자기의 법이 아닌 상대방의 법을 선택해서 대화하자는 데에 놀라움을 표하고, 니그로다 유행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덕이시여, 우리들은 고행에 의한 혐오를 교설로 하고, 고행에 의한 혐오를 본질로 하고, 고행에 의한 혐오를 고수하며 머뭅니다. 대덕이시여, 어떻게 고행에 의한 혐오가 완성됩니까? 어떻게 완성되지 않습니까?
●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경의 주제입니다. 이제 세존은 답변을 시작합니다.
1. 고행①-고행②-고행③을 말함.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6_06&wr_id=1
“니그로다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러하다면 이 경우에 고행에 의한 혐오는 완성된 것입니까,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이 경우에 고행에 의한 혐오는 완성된 것입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니그로다여, 참으로 나는 이런 완성에게도 고행에 의한 혐오의 여러 가지 오염들을 말합니다.”
이런 고행은 그 결과로 혐오(嫌惡)[jigucchā: disgust for; dislike; detestation. (f.)]를 완성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완성은 「염오(厭惡)[nibbidā: aversion; disgust; weariness. (f.)] → 이탐(離貪) → 소멸(消滅)」에 의한 오염원의 제거에 의해 성취됩니다. 그래서 세존은 “니그로다여, 참으로 나는 이런 완성에게도 고행에 의한 혐오의 여러 가지 오염들을 말합니다.”라고 하여 오염으로 주제를 전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