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문[brāhmaṇa]의 정의
바라문[brāhmaṇa]의 정의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3_04&wr_id=15에서 다시 번역/정리하였습니다.
바라문[brāhmaṇa] ㅡ 경전은 많은 곳에서 바라문을 힌두교의 사제라는 의미가 아닌 수행자 또는 아라한과 동등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세기경(D27) - 세상의 기원 4)바라문-와이샤-수드라-사문 집단의 출현」에서 그 근거를 말해줍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ㅡ '여보시오, 악(惡)한 법들이 중생들에게 생겼습니다. 참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이 알려질 것이고 비난이 알려질 것이고 거짓말이 알려질 것이고 처벌이 알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우리는 악(惡)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없애야 하겠습니다.'라고. 그들은 악(惡)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없앴다. 와셋타여, 악(惡)한 불선법(不善法)들을 없앤다고 해서 '바라문, 바라문'이라는 단어가 첫 번째로 생겨났다.
그들은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오두막에서 선(禪)을 하였다. 그들은 숯불에서 벗어나고 연기에서 벗어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식사를 위하고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번화가와 수도로 가서 탁발하였다. 그들은 탁발을 마친 뒤 다시 오두막으로 가서 선(禪)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런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ㅡ '여보시오. 이 중생들은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오두막에서 선(禪)을 합니다. 그들은 숯불에서 벗어나고 연기에서 벗어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식사를 위하고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번화가와 수도로 가서 탁발합니다. 그들은 탁발을 마친 뒤 다시 오두막으로 가서 선(禪)을 합니다.'라고. 와셋타여, 선(禪)을 한다고 해서 '선(禪)을 하는 자, 선(禪)을 하는 자'라는 두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 jhāyaka: one who meditates. (m.)
와셋타여, 그 중생들 가운데 어떤 중생들은 숲 속의 오두막에서 그 선(禪)을 지속할 수 없어지자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 인간들은 이런 그들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ㅡ '숲 속의 오두막에서 그 선(禪)을 지속할 수 없어지자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 이들은 이제 선(禪)을 하지 않는다.'라고. 와셋타여, 이들은 이제 선(禪)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禪)을 하지 않는 자, 선(禪)을 하지 않는 자(베다를 공부하는 자)'라는 세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와셋타여, 이들은 그때는 저열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최상으로 간주된다.
→ ajjhāyaka: an instructor; teacher. (m.)
한편, 「마을 주변이나 번화가 주변으로 가서 교재들을 만들면서 정착하였다.」의 과정에 대해서는 숫따니빠따의 2. cūḷavaggo, 7. brāhmaṇadhammikasuttaṃ (KN 5.19)에서 설명됩니다. 전도된 견해가 생겨난 바라문들은 소들을 둘러싼 무리, 정복한 아름다운 여인들, 인간의 큰 재물을 간탐(慳貪) 하게 되고, 만뜨라들을 생각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사를 유도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와셋타여, 이와 같이 이러한 바라문의 일원이 이와 같은 오래된 세상의 기원과 함께하는 단어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들은 중생들로부터 생겨났지 다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생겨났지 다른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 생겨났지 비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와셋타여, 참으로 지금여기에서도 미래에서도 법은 이 세상에서 최상이다."
※ 삼명경(D13)에서는 바라문과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tevijjā brāhmaṇā]을 구분하여 설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내용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