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dhividhadesanā (DN 28.16-믿음을 고양하는 경, 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문)
5. sampasādanīyasuttaṃ, iddhividhadesanā (DN 28.16-믿음을 고양하는 경, 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문)
나아가,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이런 두 가지로 구성된 신통이 있습니다. ― 대덕이시여, 번뇌들과 함께하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한 신통이 있는데,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다. 대덕이시여, 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 있는데,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다. 대덕이시여, 무엇이 번뇌들과 함께하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한 신통이어서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까? 여기, 대덕이시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불방일하고 바르게 작의 한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다양한 신통을 구성하는 것들을 실현하는 그런 심(心)의 삼매[심삼매(心三昧)]를 성취합니다. 하나였다가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분말과 성벽과 산을 가로지르기를 허공에서처럼 닿지 않고 갑니다. 땅에서도 물에서처럼 떠오르고 들어갑니다. 물에서도 땅에서처럼 빠지지 않고 갑니다. 허공에서도 가부좌하고 날개 달린 새처럼 갑니다. 이렇게 강력하고 웅장한 저 달과 해를 손으로 닿아 쓰다듬습니다. 범천의 세상까지도 몸으로 나아갑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이 번뇌들과 함께하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한 신통이어서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다.
대덕이시여, 무엇이 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어서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까? 대덕이시여, 여기 비구는 만약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들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잔냐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잔냐를 가지고 거기에 머뭅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이 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재생의 조건에 속한 것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어서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다. 대덕이시여, 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이것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남김없이 실답게 아십니다. 그것을 남김없이 실답게 아시는 세존에게, 유익한 법들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더욱 실다운 지혜로써 세존을 넘어선 실답게 아는 어떤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을 것이어서, 이 이상 더 실답게 알아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