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khallikānuyogo (DN 29.10-정신(淨信) 경,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
6. pāsādikasuttaṃ, sukhallikānuyogo (DN 29.10-정신(淨信) 경,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
쭌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즐거움을 주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경우가 있다. 쭌다여, 이렇게 말하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ㅡ ‘도반들이여, 무엇이 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입니까?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은 많고 다양하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쭌다여,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 있다. 어떤 넷인가?
“idha, cunda, ekacco bālo pāṇe vadhitvā vadh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ayaṃ paṭhamo sukhallikānuyogo.
여기, 쭌다여, 어떤 어리석은 자는 생명들을 거듭 해치는 것을 원인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adinnaṃ ādiyitvā ādiy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ayaṃ dutiyo sukhallikānuyogo.
다시,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거듭 가지는 것을 원인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musā bhaṇitvā bhaṇ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ayaṃ tatiyo sukhallikānuyogo.
다시,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을 거듭 말하는 것을 원인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o samaṅgībhūto paricāreti. ayaṃ catuttho sukhallikānuyogo.
다시, 쭌다여, 여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붙잡고 소유한 어떤 자는 자신을 즐겁게 한다. 이것이 네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이것이, 쭌다여,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쭌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이런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경우가 있다. 그들에게 그대들은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그대들에게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지 않은 것으로 거짓에 의해 비난하는 것이다.
쭌다여, 온전히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 있다. 어떤 넷인가?
여기, 쭌다여, 비구는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로부터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다시, 쭌다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puna caparaṃ, cunda,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 pe ...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tatiyo sukhallikānuyogo.
다시, 쭌다여, 비구는 기쁨의 빛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한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다시, 쭌다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이것이, 쭌다여, 온전히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의 실천이다.
쭌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이런 네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그들에게 그대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그대들에게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들에게 있지 않은 것으로 거짓에 의해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