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 33.9-합송경, 여섯으로 구성된 법들) 326. 여섯 가지 해방되어야 하는 요소
10. saṅgītisuttaṃ, chakkaṃ (DN 33.9-합송경, 여섯으로 구성된 법들) 326.
여섯 가지 해방되어야 하는 요소 ― 「여기,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자심해탈(慈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분노는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자심해탈(慈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분노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자심해탈(慈心解脫), 이것은 분노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비심해탈(悲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폭력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비심해탈(悲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폭력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비심해탈(悲心解脫), 이것은 폭력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희심해탈(喜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불쾌는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희심해탈(喜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불쾌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희심해탈(喜心解脫), 이것은 불쾌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사심해탈(捨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탐(貪)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사심해탈(捨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탐(貪)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사심해탈(捨心解脫), 이것은 탐(貪)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상(相)을 따르는 식(識)이 있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상(相)을 따르는 식(識)이 있을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 이것은 모든 상(相)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나는 있다.’가 제거되었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가 제거된 곳에서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 자에게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가 뿌리 뽑힘, 이것은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