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ṭṭha dhammā (DN 34.9-여덟 가지 법)
● aṭṭha dhammā (DN 34.9-여덟 가지 법)
여덟 가지 법은 많은 것을 만들고, 여덟 가지 법은 닦아야 하고, 여덟 가지 법은 완전히 알아야 하고, 여덟 가지 법은 버려야 하고, 여덟 가지 법은 퇴보로 이끌고, 여덟 가지 법은 진보로 이끌고, 여덟 가지 법은 꿰뚫기 어렵고, 여덟 가지 법은 생기게 해야 하고, 여덟 가지 법은 실답게 알아야 하고, 여덟 가지 법은 실현해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이 많은 것을 만듭니까?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이런 여덟 가지 원인과 여덟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떤 여덟 가지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스승이나 어떤 존중할 만한 동료수행자를 의지하여 머물고, 거기서 강한 히리와 옷땁빠 그리고 사랑과 존경이 확립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첫 번째 원인이고 첫 번째 조건이다.
그 스승이나 어떤 존중할 만한 동료수행자를 의지하여 머물고, 거기서 강한 히리와 옷땁빠 그리고 사랑과 존경이 확립된다. 그는 적절한 때에 그들에게 다가가서 '대덕이시여,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고 질문한다. 그에게 그 존자들은 드러나지 않은 것은 드러내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해서 의문을 가진 여러 가지 법들에 대한 의문을 제거해준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두 번째 원인이고 두 번째 조건이다.
그 법을 배운 뒤 신(身)의 떠남과 심(心)의 떠남이라는 한 쌍의 떠남에 의해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세 번째 원인이고 세 번째 조건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계(戒)를 중시한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문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네 번째 원인이고 네 번째 조건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명심하고, 배운 것을 쌓는다.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들과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선언하는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만족하고 말로써 실천하고 의(意)로써 이어 보고 견해로써 잘 꿰뚫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다섯 번째 원인이고 다섯 번째 조건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불선법(不善法)들의 버림을 위해, 선법(善法)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면서 머문다. 선법들에 대해 열정적이고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여섯 번째 원인이고 여섯 번째 조건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사띠를 가졌다. 최상의 사띠와 신중함을 갖추어 오래전에 행한 것에게도, 오래전에 말한 것에게도 다가가서 기억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일곱 번째 원인이고 일곱 번째 조건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오취온(五取蘊)에서 자라남과 줄어듦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이렇게 수(受)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수(受)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상(想)이 있고, 이렇게 상(想)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상(想)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이렇게 행(行)들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행(行)들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의 시작에 속하는 지혜에 대해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얻은 것은 더 커짐-충만-닦음-완성으로 이끄는 여덟 번째 원인이고 여덟 번째 조건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이 많은 것을 만듭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닦아야 합니까? 팔정도(八正道) 즉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 여덟 가지 법을 닦아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완전히 알아야 합니까? 여덟 가지 세상의 법 ― 「얻음과 잃음, 명성과 악명, 비난과 칭찬, 즐거움과 괴로움」 이 여덟 가지 법을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버려야 합니까? 여덟 가지 삿됨 ―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삿된 행위, 삿된 생활, 삿된 정진, 삿된 사띠, 삿된 삼매」 이 여덟 가지 법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이 퇴보로 이끕니까? 여덟 가지 게으름의 이유 ―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가 일을 해야 한다. 그에게 ‘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을 하는 나에게 몸이 피로해질 것이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첫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일을 했다. 그에게 ‘나는 일을 했다. 일을 해서 몸이 피곤하니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두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길을 가야 한다. 그에게 ‘나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길을 가는 나에게 몸이 피로해질 것이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세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길을 갔다. 그에게 ‘나는 길을 갔다. 길을 가서 몸이 피곤하니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네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탁발을 위해 마을이나 번화가를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에게 ‘나는 탁발을 위해 마을이나 번화가를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지 못했다. 그런 나의 몸은 피곤하고, 준비되지 못했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다섯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탁발을 위해 마을이나 번화가를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는다. 그에게 ‘나는 탁발을 위해 마을이나 번화가를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었다. 그런 나의 몸은, 생각건대, 콩 무더기처럼 무겁고, 준비되지 못했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여섯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작은 병에 걸린다. 그에게 ‘나는 누워줘야 하는 작은 병에 걸렸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일곱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병에서 회복한 비구가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지 않았다. 그에게 ‘병에서 회복한 나는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지 않다. 그런 나의 몸은 힘이 없고, 준비되지 못했다. 나는 누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눕는다.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여덟 번째 게으름의 이유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이 퇴보로 이끕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이 진보로 이끕니까? 여덟 가지 시작하는 이유 ―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가 일을 해야 한다. 그에게 ‘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을 하는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첫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일을 했다. 그에게 ‘나는 일을 했다. 일하는 동안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고할 수 없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두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길을 가야 한다. 그에게 ‘나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길을 가는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세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길을 갔다. 그에게 ‘나는 길을 갔다. 길을 가는 동안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고할 수 없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네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을이나 번화가를 탁발을 위해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에게 ‘나는 마을이나 번화가를 탁발을 위해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지 못했다. 그런 나의 몸은 가볍고, 준비되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다섯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마을이나 번화가를 탁발을 위해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는다. 그에게 ‘나는 마을이나 번화가를 탁발을 위해 걸으면서 거칠거나 좋은 음식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얻었다. 그런 나의 몸은 힘이 있고, 준비되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여섯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작은 병에 걸린다. 그에게 ‘나는 누워줘야 하는 작은 병에 걸렸다. 그런데 나의 병이 깊어질 수도 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일곱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병에서 회복한 비구가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지 않았다. 그에게 ‘병에서 회복한 나는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지 않다. 그런데 나에게 병이 재발할 수도 있다. 나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먼저 노력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한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여덟 번째 시작하는 이유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이 진보로 이끕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덟 가지 ― 「여기,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지옥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첫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짐승 세상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두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귀 세상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세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긴 수명을 가진 신(神)들의 무리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네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비구-비구니-남신자-여신자가 가지 않는 변방 지역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존재감 없는 낮은 신분이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다섯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삿된 견해를 가져서 바르게 보지 못한다. ―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봉헌(奉獻)도 없다.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業)들에게 과(果)도 없고 보(報)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없다.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라고.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섯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지혜가 없고, 어리석고, 바보여서, 잘 말해진 것과 잘못 말해진 것의 의미를 아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일곱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지혜가 있고, 어리석지 않고, 바보가 아니어서, 잘 말해진 것과 잘못 말해진 것의 의미를 아는 것에 능숙하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덟 번째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생기게 해야 합니까? 여덟 가지 대인(大人)의 생각 떠오름 ― 「이 법은 원하는 것이 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원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만족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만족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홀로 머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함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사띠를 확립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사띠를 잊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삼매를 닦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삼매를 닦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지혜를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지혜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법은 희론 없음을 즐기고 희론 없음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법은 희론을 즐기고 희론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여덟 가지 법을 생기게 해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실답게 알아야 합니까? 여덟 가지 정복의 경지[팔승처(八勝處)] ― 「어떤 자는 안으로 색상(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제한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색상(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무량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제한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무량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네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아마 꽃은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녔다. 이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깐니까라 꽃은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녔다. 이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월계꽃은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녔다. 이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샛별은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녔다. 이처럼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여덟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을 실답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을 실현해야 합니까? 여덟 가지 해탈[팔해탈(八解脫)] ― 「색계(色界)의 존재로서 물질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진[색상(色想)을 초월한] 자로서 밖으로 물질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오직 깨끗함에 집중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색상(色想)을 완전히 넘어서고 저항의 상(想)을 내려놓고 다양함의 상(想)을 위해 작의하지 않고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공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고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식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무소유처를 완전히 넘어서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넘어서고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을 실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런 여든 가지 법은 자연스럽고, 진실이고, 사실이고, 사실을 벗어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생겨나지 않는, 여래(如來)께서 바르게 깨달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