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꿰뚫기 어려운 법
7. 꿰뚫기 어려운 법
어떤 한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끊어지지 않는 심삼매(心三昧). 이 한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두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중생의 오염을 위한 원인과 조건, 중생의 청정을 위한 원인과 조건. 이 두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세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세 가지 해방(解放)되어야 하는 계(界) ― 욕(慾)에게 출리(出離)라는 해방, 색(色)에게 무색(無色)이라는 해방, 어떤 것이든 누적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에게 멸(滅)이라는 해방. 이 세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네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네 가지 삼매 ― 「퇴보로 이끄는 삼매, 안정으로 이끄는 삼매, 진보로 이끄는 삼매, 꿰뚫음으로 이끄는 삼매」 이 네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다섯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여섯 가지 해방되어야 하는 요소 ―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가 소유의 사유를 작의(作意)할 때 심(心)은 소유의 삶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출리(出離)를 작의할 때 심(心)은 출리에 대해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심(心)은 잘 행해졌고 잘 수행되었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소유의 삶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소유의 사유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유의 삶의 해방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분노를 작의(作意)할 때 심(心)은 분노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분노 않음을 작의할 때 심(心)은 분노 않음에 대해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심(心)은 잘 행해졌고 잘 수행되었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진에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분노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분노의 해방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폭력을 작의(作意)할 때 심(心)은 폭력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비폭력을 작의할 때 심(心)은 비폭력에 대해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심(心)은 잘 행해졌고 잘 수행되었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폭력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폭력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폭력의 해방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색(色)들을 작의(作意)할 때 심(心)은 색(色)들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무색(無色)을 작의할 때 심(心)은 무색(無色)에 대해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심(心)은 잘 행해졌고 잘 수행되었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색(色)들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색(色)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색(色)들의 해방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가 유신(有身)을 작의(作意)할 때 심(心)은 유신(有身)에 대해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유신(有身)의 멸(滅)을 작의할 때 심(心)은 유신(有身)의 멸(滅)에 대해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그에게 그 심(心)은 잘 행해졌고 잘 수행되었고 잘 일어났고 잘 해탈했고 유신(有身)에 의한 묶임에서 잘 풀려났다. 유신(有身)의 조건으로부터 번뇌들이 생기는 자들에게 걱정과 열기가 있다. 그는 그것들에서 벗어났고, 그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신(有身)의 해방이라고 선언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여섯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여섯 가지 해방되어야 하는 요소 ― 「여기,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자심해탈(慈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분노는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자심해탈(慈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분노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자심해탈(慈心解脫), 이것은 분노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비심해탈(悲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폭력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비심해탈(悲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폭력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비심해탈(悲心解脫), 이것은 폭력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희심해탈(喜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불쾌는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희심해탈(喜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불쾌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희심해탈(喜心解脫), 이것은 불쾌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사심해탈(捨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탐(貪)은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사심해탈(捨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탐(貪)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사심해탈(捨心解脫), 이것은 탐(貪)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상(相)을 따르는 식(識)이 있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닦고, 많이 행하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고, 이어 머물고, 쌓고, 잘 떠맡은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을 얻은 사람에게 상(相)을 따르는 식(識)이 있을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 이것은 모든 상(相)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다시,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에게 ‘나는 있다.’가 제거되었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러지 마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중상하지 마시오.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가 제거된 곳에서 ‘나는 이것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 자에게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이 심(心)을 소진(消盡)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가 뿌리 뽑힘, 이것은 의심과 불확실함의 화살의 해방(解放)입니다.’라고.」 이 여섯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일곱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일곱 가지 고결한 사람의 법 ―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법을 알고, 의미를 알고, 자신을 알고, 정도를 알고, 때를 알고, 모임을 알고 인간을 안다.」 이 일곱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여덟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덟 가지 ― 「여기,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지옥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첫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짐승 세상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두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귀 세상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세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긴 수명을 가진 신(神)들의 무리에 태어났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네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비구-비구니-남신자-여신자가 가지 않는 변방 지역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존재감 없는 낮은 신분이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다섯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삿된 견해를 가져서 바르게 보지 못한다. ―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봉헌(奉獻)도 없다.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業)들에게 과(果)도 없고 보(報)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없다.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라고.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섯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지혜가 없고, 어리석고, 바보여서, 잘 말해진 것과 잘못 말해진 것의 의미를 아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일곱 번째이다.
다시, 도반들이여,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서(善逝)에 의해 선언된 가라앉음으로 완전한 꺼짐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이 설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 지역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지혜가 있고, 어리석지 않고, 바보가 아니어서, 잘 말해진 것과 잘못 말해진 것의 의미를 아는 것에 능숙하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기회가 아니고 때가 아닌 여덟 번째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아홉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아홉 가지 다양함 ― 「계(界)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촉(觸)의 다양함이 생기고, 촉(觸)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수(受)의 다양함이 생기고, 수(受)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상(想)의 다양함이 생기고, 상(想)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사유의 다양함이 생기고, 사유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관심의 다양함이 생기고, 관심이 다양함을 연(緣)하여 열기의 다양함이 생기고, 열기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조사의 다양함이 생기고, 조사의 다양함을 연(緣)하여 얻음의 다양함이 생긴다.」 이 아홉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
어떤 열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까? 열 가지 성스러운 삶 ―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다섯으로 구성된 것을 제거한 자이고, 여섯으로 구성된 것을 갖춘 자이고, 한 가지 보호를 가진 자이고, 네 가지로 지지된 자이고, 치우친 진리를 버린 자이고, 집착된 추구를 끝낸 자이고, 사유가 평정한 자이고, 신행(身行)이 진정된 자이고, 잘 해탈된 심(心)을 가진 자이고, 지혜로 잘 해탈한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다섯으로 구성된 것을 제거한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소유의 관심이 버려지고, 진에(瞋恚)가 버려지고, 해태-혼침이 버려지고, 들뜸-후회가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졌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다섯으로 구성된 것을 제거한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여섯으로 구성된 것을 갖춘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진 자로 머문다.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닿으면서 …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진 자로 머문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여섯으로 구성된 것을 갖춘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한 가지 보호를 가진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사띠에 의해 보호된 심(心)을 갖춘 자이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한 가지 보호를 가진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네 가지로 지지된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숙고로부터 어떤 것을 수용하고, 숙고로부터 어떤 것을 참고, 숙고로부터 어떤 것을 피하고, 숙고로부터 어떤 것을 제거한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네 가지로 지지된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치우친 진리를 버린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제각각의 사문-바라문들의 제각각의 치우친 진리들, 즉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끝이 있다.’라거나, ‘세상은 끝이 없다.’라거나, ‘그 생명이 그 몸이다.’라거나, ‘다른 생명과 다른 몸이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들은 모두 제거되고, 없어지고, 포기되고, 토해지고, 내뿜어지고, 버려지고, 단념되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치우친 진리를 버린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집착된 추구를 끝낸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소유의 추구가 버려졌고, 존재의 추구가 버려졌고, 범행(梵行)의 추구가 진정되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집착된 추구를 끝낸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사유가 휘저어지지 않은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소유의 사유가 버려졌고, 분노의 사유가 버려졌고, 폭력의 사유가 버려졌다. 이렇게, 도반들이여, 비구는 사유가 휘저어지지 않은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신행(身行)이 진정된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신행(身行)이 진정된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잘 해탈된 심(心)을 가진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에게 탐(貪)으로부터 심(心)이 해탈했고, 진(嗔)으로부터 심(心)이 해탈했고, 치(癡)로부터 심(心)이 해탈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잘 해탈된 심(心)을 가진 자이다.
도반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지혜로 잘 해탈한 자인가?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나에게 탐(貪)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라고 분명히 안다. ‘나에게 진(嗔)은 버려지고 … 나에게 치(癡)는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라고 분명히 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지혜로 잘 해탈한 자이다.」 이 열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