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kka(위딱까)와 parivitakka(빠리위딱까) ― 제2선(무심무사) 이후의 삶의 전개(MN 147-라훌라를 위한 …
▣ vitakka(위딱까)와 parivitakka(빠리위딱까) ― 제2선(무심무사) 이후의 삶의 전개(MN 147-라훌라를 위한 가르침의 작은 경)(해피스님 241031)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N_mp0c-kHY
• vitakka(vi-takka) = takka에서 떠오르는 생각
위딱까는 딱까로부터의 분리 즉 애(愛)의 형성 과정인 딱까로부터 애(愛)에 의한 고집(苦集)의 삶이 출발하는 현상(떠오른 생각)입니다. 딱까가 몸과 함께하지 않은 식(識)과 심(心)의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분리라는 것은 몸과 함께하는 의(意)의 영역에 진입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위딱까는 소유의 위딱까-분노의 위딱까-폭력의 위딱까 부분과 출리의 위딱까-분노하지 않는 위따까-비폭력의 위딱까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MN 122-공(空)의 큰 경)에 의하면, 소유의 위딱까 등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고, 염오-이탐-소멸-가라앉음-실다운 지혜-깨달음-열반으로 이끌지 못해서 떠오르게 하지 않아야 하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성스러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끌어서 떠오르게 해야 합니다.
또한,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에 의하면, 소유의 위딱까 등은 ‘나도 해로움으로 이끌고 남도 해로움으로 이끌고 둘 모두도 해로움으로 이끌며, 지혜의 소멸에 속하고, 파괴의 편에 속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 것’이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나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고 남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고 둘 모두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으며, 지혜의 증대에 속하고, 생산의 편에 속하고,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의 위딱까 등은 분명히 알고 숙고하여 버리고 제거하고 끝나게 해야 하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접근하게 해야 합니다. 다만, 너무 오래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접근하게 하면 몸이 피곤해지고, 몸이 피곤하면 심이 산란해지고, 심이 산란하면 심이 삼매로부터 멀어지게 되므로 심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심을 안으로 진정되게 하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하고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딱까는 제한적입니다. ― 「초선의 유심유사(有尋有伺) → 머무는 과정 : 무심유사(無心有伺) → 제2선의 무심무사(無尋無伺)」
위딱까는 위짜라와 함께 그 범주가 소유에 국한되고 그 범주를 넘어서면 초선에서 순일한 출리의 위딱까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제2선을 성취하면 위딱까도 위짜라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MN 111-순서대로 경)은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위딱까 이후의 삶의 골격을 구성하는 촉(觸)-수(受)-상(想)-사(思)-심(心)-관심-작의(作意)의 법들이 있습니다. 딱까에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딱까 밖을 구성하는 법들이 있다는 것은 무심무사의 제2선 이후에도 생각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위딱까는 욕계와 초선까지의 범주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지시하는 제한적 개념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딱까가 없어진 이후의 경지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parivutakka(온전한 생각 떠오름)가 그 내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parivutakka(온전한 생각 떠오름)은 몇 가지 용례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데, 모두 높은 수행의 경지에서의 생각 떠오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주제의 확장 ― 「vitakka와 parivitakka」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