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tthasuttaṃ (MN 7-옷감 경)
1. mūlapariyāyavaggo, 7. vatthasuttaṃ (MN 7-옷감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거기서 세존은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오염되고 때가 묻은 옷감이 있다. 그런 그것을 세탁하는 사람이 파랑이나 노랑이나 빨강이나 자주 등 각각의 여러 염료에 담글 것인데, 색을 염색하기가 어렵고 색을 깨끗이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옷감이 깨끗하지 않음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심(心)이 오염되었을 때, 나쁜 곳이 예상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끗하고 때 묻지 않은 옷감이 있다. 그런 그것을 세탁하는 사람이 파랑이나 노랑이나 빨강이나 자주 등 각각의 여러 염료에 담글 것인데, 색을 염색하기가 쉽고 색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옷감이 깨끗함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심(心)이 오염되지 않았을 때, 좋은 곳이 예상된다.
• vatthaṃ saṃkiliṭṭhaṃ malaggahitaṃ의 용례 ― (SN 22.89-케마까 경)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심의 오염원인가? 망(望)이 일어난 간탐(*)이 심의 오염원이다. 진에가 심의 오염원이다. 화가 심의 오염원이다. 원한이 심의 오염원이다. 위선이 심의 오염원이다. 악의가 심의 오염원이다. 질투가 심의 오염원이다. 인색이 심의 오염원이다. 사기가 심의 오염원이다. 교활이 심의 오염원이다. 고집이 심의 오염원이다. 격분이 심의 오염원이다. 자기화가 심의 오염원이다. 오만이 심의 오염원이다. 잠김이 심의 오염원이다. 방일이 심의 오염원이다.
• 심의 오염원 ― (MN 3-법(法)의 후계자 경)과 비교
(*) abhijjhāvisamalobha의 용례 ― (MN 7-옷감 경)/(AN 4.61-배운 사람의 행위 경)
비구들이여, 비구는 ‘망(望)이 일어난 간탐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망(望)이 일어난 간탐을 버린다. ‘진에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진에를 버린다. ‘화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화를 버린다. ‘원한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원한을 버린다. ‘위선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위선을 버린다. ‘악의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악의를 버린다. ‘질투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질투를 버린다. ‘인색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인색을 버린다. ‘사기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사기를 버린다. ‘교활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교활을 버린다. ‘고집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고집을 버린다. ‘격분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격분을 버린다. ‘자기화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자기화를 버린다. ‘오만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오만을 버린다. ‘잠김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잠김을 버린다. ‘방일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심의 오염원인 방일을 버린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망(望)이 일어난 간탐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망(望)이 일어난 간탐이 버려지고, ‘진에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진에가 버려지고, ‘화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화가 버려지고, ‘원한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원한이 버려지고, ‘위선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위선이 버려지고, ‘악의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악의가 버려지고, ‘질투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질투가 버려지고, ‘인색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인색이 버려지고, ‘사기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사기가 버려지고, ‘교활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교활이 버려지고, ‘고집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고집이 버려지고, ‘격분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격분이 버려지고, ‘자기화가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자기화 버려지고, ‘오만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오만이 버려지고, ‘잠김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잠김이 버려지고, ‘방일이 심의 오염원이다.’라고 알아서 심의 오염원인 방일이 버려질 때,
그는 부처님[불(佛)]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가르침[법(法)]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 '세존(世尊)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상가[승(僧)]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춘다. ― ‘세존의 제자 상가는 잘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올곧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방법에 맞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가르침에 일치하게 실천한다. 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이 세존의 제자 상가이니,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또한, 제한적인 포기, 토함, 해방, 버려짐, 놓음에 따라 그는 ‘나는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췄다.’라고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의(意)가 희열하면 몸이 진정되고, 몸이 진정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들어진다. ‘가르침에 대한 … 나는 상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췄다.’라고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의(意)가 희열하면 몸이 진정되고, 몸이 진정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들어진다.
‘나에게 제한적인 포기, 토함, 해방, 버려짐, 놓음이 있다.’라고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수반되는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의(意)가 희열하면 몸이 진정되고, 몸이 진정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들어진다.
• atthaveda-dhammaveda ― 의미에 대한 앎-법에 대한 앎
• 삼매 가는 길
비구들이여, 이렇게 계를 지니고, 이렇게 법을 지니고, 이렇게 지혜를 지닌 그 비구는 만약 맛있는 탁발 음식 즉 흰 쌀밥과 여러 가지 국과 여러 가지 양념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오염되고 때가 묻은 옷감은 깨끗한 물에 의해 깨끗해지고 청정해진다. 금은 용광로에 의해 깨끗해지고 청정해진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렇게 계를 지니고, 이렇게 법을 지니고, 이렇게 지혜를 지닌 그 비구는 만약 맛있는 탁발 음식 즉 흰 쌀밥과 여러 가지 국과 여러 가지 양념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문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문다.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문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문다.
그는 ‘이것이 있다. 낮은 것이 있다. 뛰어난 것이 있다. 이 상(想)에 속한 것을 넘어선 해방이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에게 소유의 번뇌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하고, 무명(無明)의 번뇌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는 내적인 목욕으로 목욕한 자’라고 불린다.”
그때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의 가까이에 앉아있었다.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런데 고따마 존자는 바후까 강으로 목욕하기 위해 가십니까?”라고. “바라문이여, 바후까 강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바후까 강이 무엇을 만듭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사람들에게 바후까 강은 세상의 부서짐을 위한 것이라고 동의 된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사람들에게 바후까 강은 공덕을 위한 것이라고 동의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후까 강에서 지어진 악업을 흘려보냅니다.”라고. 그러자 세존은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
“bāhukaṃ adhikakkañca, gayaṃ sundarikaṃ mapi.sarassatiṃ payāgañca, atho bāhumatiṃ nadiṃ.niccampi bālo pakkhando, kaṇhakammo na sujjhati.
바후까 강, 아디깍까 강, 가야 강, 순다리까 강
사랏사띠 강, 빠야가 강, 그리고 바후마띠 강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뛰어들지만 나쁜 업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kiṃ sundarikā karissati, kiṃ payāgā kiṃ bāhukā nadī.veriṃ katakibbisaṃ naraṃ, na hi naṃ sodhaye pāpakamminaṃ.
순다리까 강이 무엇을 하는가? 빠야가 강이 무엇을 하고,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하는가?
원망하고, 죄를 지은 사람, 악업을 지은 그를 정화하지 못한다.
“suddhassa ve sadā phaggu, suddhassuposatho sadā.suddhassa sucikammassa, sadā sampajjate vataṃ.idheva sināhi brāhmaṇa, sabbabhūtesu karohi khemataṃ.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정화하는 날이고,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포살일이다.
청정하고 업이 깨끗한 자에게는 항상 종교적 의무가 이어진다.
바라문이여, 오직 여기에서 목욕하라. 모든 존재에 대해 안온을 행하라.
“sace musā na bhaṇasi, sace pāṇaṃ na hiṃsasi.sace adinnaṃ nādiyasi, saddahāno amaccharī.kiṃ kāhasi gayaṃ gantvā, udapānopi te gayā”ti.
믿음을 가진 자는 인색하지 않다. 거짓이라면 말하지 않고,
생명이라면 해치지 않고,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가지지 않는다.
가야 강에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에게 가야 강은 우물이라네.
이렇게 말했을 때,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저는 고따마 존자의 앞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앞에서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로써 머문 순다리까바라드와자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범행(梵行)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실답게 알았다.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 중의 한 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