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正見) 경 - 1)유익-무익, 2)사식, 3)사성제] 1. mūlapariyāyavaggo, 9. sammādiṭṭhi…
1. mūlapariyāyavaggo, 9. sammādiṭṭhisuttaṃ (MN 9-정견(正見)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가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바른 견해[정견(正見)], 바른 견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얼마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까?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까?”
“도반이여, 이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 저희는 멀리서라도 사리뿟따 존자의 곁으로 와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해주신다면 참으로 사리뿟따 존자께 감사할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에게 듣고서 비구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반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무익(無益)을 분명히 알고, 무익의 뿌리를 분명히 알고, 유익(有益)을 분명히 알고 유익의 뿌리를 분명히 알 때,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무익이고 무엇이 무익의 뿌리이며, 무엇이 유익이고 무엇이 유익의 뿌리입니까? 도반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것이 무익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이 무익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이 무익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무익이고, 험담하는 것이 무익이고, 거친 말을 하는 것이 무익이고,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이 무익이고, 간탐이 무익이고, 진에가 무익이고, 사견이 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무익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무익의 뿌리입니까? 망(望)이 무익의 뿌리이고, 진(嗔)이 무익의 뿌리이고, 치(癡)가 무익의 뿌리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무익의 뿌리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유익(有益)입니까?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험담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거친 말을 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을 삼감이 유익이고, 불간탐이 유익이고, 부진에가 유익이고, 정견이 유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유익이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유익의 뿌리입니까? 무망(無望)이 유익의 뿌리이고, 무진(無嗔)이 유익의 뿌리이고, 무치(無癡)가 유익의 뿌리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유익의 뿌리라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무익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무익의 뿌리를 분명히 알고, 이렇게 유익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유익의 뿌리를 분명히 알 때, 그는 탐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는 견해와 자기화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無明)을 버리고 명(明)을 생기게 하고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훌륭합니다, 도반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 “그런데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이고,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이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자량(資糧)을 꿰뚫어 알고, 자량의 자라남[집(集)]을 꿰뚫어 알고, 자량의 소멸[멸(滅)]을 꿰뚫어 알고, 자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멸도(滅道)]을 꿰뚫어 알 때,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자량이고, 무엇이 자량의 자라남이고, 무엇이 자량의 소멸이고, 무엇이 자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입니까? 도반들이여, 활성존재인 중생을 유지하기 위한,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기 위한 네 가지 자량[사식(四食)]이 있습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자량[단식(段食)], 촉(觸)이 두 번째이고[촉식(觸食)], 의사(意思)가 세 번째이고[의사식(意思食)], 식(識)이 네 번째입니다[식식(識食)]. 애(愛)의 집(集)이 자량의 집(集)이고, 애(愛)의 멸(滅)이 자량의 멸(滅)입니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道)가 자량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입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자량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자량의 집(集)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자량의 멸(滅)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자량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 때, 그는 탐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는 견해와 자기화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을 생기게 하고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훌륭합니다, 도반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라뿟따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 “그런데 도반이시여,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이고,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이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고(苦)]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자라남[고집(苦集)]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소멸[고멸(苦滅)]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고멸도(苦滅道)]을 꿰뚫어 알 때,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의 자라남이고,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입니까? 태어남[생(生)]도 괴로움이고, 늙음[노(老)]도 괴로움이고, 죽음[사(死)]도 괴로움이고,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도 괴로움이고, 재미없는 것들과 함께 엮이는 것도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이고, 즐거운 것들과 갈라지는 것도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구부득고(求不得苦)]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오취온이 괴로움입니다[오취온고(五取蘊苦)]. 도반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자라남입니까? 「다시 존재가 되고, 소망과 탐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애(愛)가 괴로움의 자라남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인데, 소유의 애, 존재의 애, 존재에서 벗어남의 애[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자라남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입니까? 애의 완전히 바랜 소멸, 포기, 놓음, 풀림, 잡지 않음 ― 도반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입니까? 오직 이것,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가 자량의 멸로 이끄는 실천입니다.
도반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괴로움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괴로움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괴로움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 때, 그는 탐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는 견해와 자기화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을 생기게 하고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갖춘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으로 온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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