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유(有)-bhava]는 무엇인가?
존재[유(有)-bhava]는 무엇인가? [중생(衆生)-존재(bhava)-유신(有身)-활성존재(bhūta)]
mahāvedallasuttaṃ (MN 43-교리문답의 큰 경)의 한 가지 주제는 존재[유(有)-bhava]입니다.
453. “kati panāvuso, bhavā”ti?
“도반이여, 몇 가지 유(有-존재)가 있습니까?”
“tayome, āvuso, bhavā — 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ti.
“도반이여, 이런 세 가지 유(有)가 있습니다. ― 욕유(慾有-욕계의 존재), 색유(色有-색계의 존재), 무색유(無色有-무색계의 존재)
“kathaṃ panāvus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도반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까?”
“avijjānīvaraṇānaṃ kho, āvuso,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tatratatrābhinandanā —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도반이여,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인 중생들이 여기저기서 기뻐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있습니다.”
“kathaṃ panāvus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도반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까?”
“avijjāvirāgā kho, āvuso, vijjuppādā taṇhānirodhā —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도반이여, 무명(無明)이 바래고 명(明)이 생겨나 애(愛)가 소멸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래에 다시 존재로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런데 존재[유(有)-bhava]는 무엇입니까? 이 설명에 의하면,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인 상태는 중생(衆生)이고, 중생이 여기저기서 기뻐하면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데, 그 태어남의 상태가 존재이고,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와 연결된 세 가지 상태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또한, 무명과 애(愛)가 해소되어 중생으로의 조건을 배제하면 미래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는데, 말하자면, 존재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은 무명과 애와 연결되는 개념이고, 존재는 중생의 기뻐함에 의한 태어남과 연결되는 개념인데, 이 두 가지 개념이 무명과 애를 매개로 연결된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과 애 그리고 태어남이라는 개념 위에서 존재는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때, (SN 12.19-우현경)은 특별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무명과 애가 해소되지 않은 채 몸이 무너지면 몸으로 가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면에 무명과 애를 해소한 뒤에 몸이 무너지면 몸으로 가지 않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무명과 애의 유무가 몸으로 가고 말고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명과 애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몸을 부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여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은 이 몸에서 다음 몸으로 옮겨가는 것 즉 죽고 태어남이고, 이렇게 태어나면 존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DN 11-대전기경)과 (SN 12.65-도시 경)은 「paccudāvattati kho idaṃ viññāṇaṃ nāmarūpamhā na paraṃ gacchati. ettāvatā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yadidaṃ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이 식(識)은 되돌아간다. 명색(名色)으로부터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 안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옮겨가거나, 다시 태어난다. 즉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고,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색(名色)의 범주 안에서 옮겨가고 다시 태어난다는 문장의 주어는 식(識)입니다. 그렇다면 몸으로 가는 것은 식(識-viññāṇa)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識)이라고 불리는 마음이 몸과 함께 내가 되어 살다가 몸이 무너져 죽으면 무명과 애의 구속 때문에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몸 즉 색(色)과 식(識)이 함께한 상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식(識)이 몸이 있는 상태를 지시하는 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몸은 kāya고, ‘있다’는 sat=sant(ppr of atthi-√as 존재하고 있는)인데, sat-kāya로 결합한 뒤 발음의 변화로 sakkāya가 된 용어입니다. 보통 유신(有身)이라고 번역하는데, 몸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식(識)이 무명과 애 때문에 몸으로 가서 몸이 있는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인 중생이 기뻐하는 삶의 결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의 존재는 그대로 몸이 있는 상태 즉 유신(有身)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때, (SN 22.78-사자 경) 등은 신(神)들도 무상(無常)하고, 안정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유신(有身)에 속해있다(sakkāyapariyāpannā)고 하여, 중생이라면 신이라 해도 몸이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신(有身)은 다시 오취온(五取蘊)으로 연결됩니다. (SN 22.105-유신(有身) 경) 등은 「katamo ca, bhikkhave, sakkāyo?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유신(有身)인가? 오취온(五取蘊)이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하여 색취온(色取蘊)-수취온(受取蘊)-상취온(想取蘊)-행취온(行取蘊)-식취온(識取蘊)이 유신(有身)이라고 알려줍니다. 색(色)과 식(識)으로의 유신(有身)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과정의 누적인 수(受)-상(想)-행(行)과 함께 오온(五蘊)을 구성하고, 여기에 집착할 때 오취온(五取蘊)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신(有身)의 확장된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취온(五取蘊)이 곧 유신(有身)으로의 중생이고 존재인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취온(五取蘊)으로의 나는 지난 삶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 삶의 누적으로의 나는 지금을 살아가는데, 촉(觸)과 작의(作意)에 의한 활성화입니다. 작의(作意)에 의해 대상을 알고[→식(識-아는 마음)], 촉(觸)에 의해 대상을 경험[→수(受-느낌/경험)]합니다. 이런 활성화의 관점에서 나는 오온(五蘊)과 촉(觸)-작의(作意)로 확장되는데, 경은 서로 조건 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SN 12.2-분석 경)은 식(識)과 명색(名色)을 이렇게 정의하는데, 사(思)는 곧 행(行)이기 때문에(SN 22.56-집착의 양상 경) 서로 조건 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은 오온(五蘊)과 촉(觸)-작의(作意)입니다.
•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ṃ?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 idaṃ vuccati nāmaṃ.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rūpaṃ. idaṃ vuccati rūpaṃ. iti idañca nāmaṃ, idañca rūp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nāmarūp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명색(名色-나마-물질)인가? 수(受), 상(想), 사(思), 촉(觸), 작의(作意) — 이것이 명(名-나마)이라 불린다.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 이것이 색(色-물질)이라 불린다. 이렇게 이것이 명(明-나마)이고, 이것이 색(色-물질)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명색(名色-나마-물질)이라고 불린다.
• “katamañca, bhikkhave, viññāṇaṃ? chayime, bhikkhave, viññāṇakāyā — cakkhuviññāṇaṃ, sotaviññāṇaṃ, ghānaviññāṇaṃ, jivhāviññāṇaṃ, kāyaviññāṇaṃ, manoviññāṇ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viññāṇ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식(識)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식(識)의 무리가 있다. —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비구들이여, 이것이 식(識)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서로 조건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은 지난 삶의 누적인 오취온(五取蘊)으로의 내가 촉(觸)과 작의(作意)에 의해 지금 세상을 만나는 활성 상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존재[유(有)-bhava]도 활성의 측면을 설명하는데, 활성존재(bhūta)입니다. 사식(四食-cattāro āhārā)은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비구들이여, 활성존재인 중생을 유지하고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네 가지 자량(資糧)이 있다.」라고 하여 존재[유(有)-bhava]와 차별되는 활성존재(bhūta)를 말합니다. 자량은 애(愛)를 인연-자라남-생김-기원으로 하기 때문에(SN 12.11-자량(資糧) 경) 활성존재(bhūta)는 존재[유(有)-bhava]가 애(愛)에 의해 활성화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SN 12.31-활성존재 경)은 활성존재에 대한 염오-이탐-소멸의 실천으로 유학(有學)이 되고, 염오-이탐-소멸하여 집착 없이 해탈할 때 법을 헤아려 아는 자 즉 아라한이 된다고 알려줍니다.
※ √bhū - to become
• bhavati: becomes; to be; exists. (bhu + a)
• bhava: the state of existence. (m.)
• bhūta: become; existed. (pp. of bhavati)
그렇다면 ’유신(有身) → 오취온(五取蘊) → 식(識)-명색(名色)‘의 진행과 ’존재[유(有)-bhava] → 활성존재(bhūta)‘의 양방향의 전개를 감안할 때 활성존재(bhūta)는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된 활성화된 나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활성존재(bhūta)에 대한 이해는 두 개의 경을 통해 검증되는데,
• 유(有)로부터 생(生)이 있고, 활성존재(bhūta)에게 노사(老死)가 있다.(MN 1-근본법문의 경)
• 그 활성존재(bhūta)가 있을 때 육입(六入)이 있다.(SN 12.12-몰리야팍구나 경)
입니다. 몸이 유지되는 금생의 삶 동안에는 순환해서 ③식(識)과 ④명색(名色)으로 ⑤육입(六入)의 조건이 되고, 몸이 무너져 죽으면 ⑩유(有-bhava)를 조건으로 태어나[⑪생(生)] 늙고 죽는[⑫노사(老死)] 삶의 과정의 주체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이때, 활성존재(bhūta)를 구성하는 식(識)과 명색(名色)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량(資糧)에 대한 탐(貪)이 있고 소망(所望)이 있고 애(愛)가 있으면 거기서 식(識)이 머물고 늘어난다. 식(識)이 머물고 늘어날 때 명색(名色)이 참여한다. 명색(名色)이 참여할 때 행(行)들이 성장한다.(SN 12.64-탐(貪) 있음 경)」라고 하여 육입(六入)으로의 순환 과정이 설명되는데, 몸이 무너져 죽었을 때 식(識)과 명색(名色)은 어떻게 구성되는지의 측면입니다.
(DN 11-대전기경)과 (SN 12.65-도시 경)에 의하면, 몸으로 가는 것은 식(識-viññāṇa)입니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 또는 몸을 포함하는 명색(名色)과 함께하여 나를 구성하는 식(識)은 다시 몸으로 가서 새로운 몸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는데, 생(生-태어남)입니다.
한편, (AN 3.62-근본 교리 등 경)은 「channaṃ, bhikkhave, dhātūnaṃ upādāya gabbhassāvakkanti hoti; okkantiyā sati nāmarūpaṃ 비구들이여, 육계(六界)의 붙잡음을 원인으로 모태에 듦이 있다. 듦이 있을 때 명색(名色)이 있다.」라고 하는데, 식(識)은 죽고 태어남의 과정에도 물질요소와 분리되지 않아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계(六界)로서 모태에 들어오고, 이때 모태에는 명색(名色)이 있어서 육계로서 붙잡은 식(識)을 맞는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왜 식(識)이 들어올 때 색(色)이 아니라 명색(名色)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태(胎)에서 수정란의 형태로 식(識)을 맞는 것이 단순한 물질요소로서의 색(色)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유전되는 DNA에 의한 몸으로의 삶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DNA에 의한 몸의 연결도 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몸으로 가는 것인 식(識)은 나의 전생에서 옵니다. 그리고 몸을 구성하는 것인 명색(名色)은 부모님의 가계(家系) 즉 남에게서 옵니다. 식(識)과 명색(名色)은 이렇게 각각의 삶의 연장선 위에서 함께 만나 나를 구성합니다. 다만, 식(識)은 나의 삶의 연장이어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고, 명색(名色)은 남의 삶에서 와서 한평생 나를 구성하지만,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다음 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존재[유(有)-bhava]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중생(衆生)-존재(bhava)-유신(有身)-활성존재(bhūta)의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답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