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43.교리문답의 큰 경7[내입처와 외입처 즉 나와 세상은 다른 것](근본경전연구회 해피…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43.교리문답의 큰 경7[내입처와 외입처 즉 나와 세상은 다른 것](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1215)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1zJ04Sw_LI
생명력을 가진 것과 경험되는 법들을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라고 해석하기 위해 생명력과 체열에 의해 유지되는 안근~신근이 의(意)를 의지처로 하여 육내입처를 구성하는 의미를 설명하고, vijānāti[인식하다]의 격변화에 대한 메커니즘적 이해를 통해 vedaniyā dhammā(경험되는 법들)이 수(受)가 아니라 육외입처인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육내-외입처의 대응이 이루어지면, 경은 육내입처 즉 내가 육외입처 즉 세상과 다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불교 안팎의 풍조가 있지만, 경은 이렇게 나와 세상이 다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으로의 불교의 지향/목적을 위한 바른 관점입니다.
āyusaṅkhārā의 번역을 ‘생명력의 형성작용들’에서 생명력에 조건지어진 것 즉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수정한 뒤 vedaniyā dhammā(경험되는 법들)과 함께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로 대응하는 일체(一切)[십이처(十二處)]라고 해석한 것이 오늘 수업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위해 생명력(āyu)과 체열에 의해 유지되는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몸이 의(意)[식(識) with 몸]를 의지처로 하여 육내입처(六內入處)를 구성하는 의미를 설명하고, vijānāti[인식하다]의 격변화에 대한 메커니즘적 이해를 통해 vedaniyā dhammā(경험되는 법들)이 수(受)가 아니라 육외입처(六外入處)인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육내-외입처의 대응이 이루어지면, 경은 인식주관인 육내입처 즉 내가 인식객관인 육외입처 즉 세상과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주제의 결론입니다. 나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불교 안팎의 풍조가 있지만, 경은 이렇게 나와 세상이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으로의 불교의 지향/목적을 위한 바른 관점입니다.
이때, (SN 35.232-꼿티까 경)은 내입처와 외입처가 서로에게 족쇄가 아니고 욕탐(欲貪)이 이 둘을 묶는 족쇄라고 말합니다. 나와 세상은 서로 다른 독립된 것인데 욕탐에 묶여서 하나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데, 다음 수업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였습니다.
● 주제 6. 다섯 가지 기능의 유지와 의지처 → 죽은 자와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
;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
1)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음
• 영역(gocara)과 대상(visaya)의 의미 ― 복수로 나타나는 육외입처(六外入處)의 영역(gocara)에서 지금 작의(作意) 된 대상(visaya)
※ 육외입처가 복수로 정의되는 점은 육외입처가 안의 것이라는 주장의 오류를 확인해 줍니다. 육외입처를 안의 것으로 이해하면 불교 교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설명하게 됩니다.
2) 의(意)가 의지처이고 의(意)가 그것들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함 ― 의(意)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의처(意處)의 의(意)와 심(心)-의(意)-식(識)의 의(意)입니다. 여기서 의지처인 의(意)는 식(識)이 몸과 함께한 상태를 지시하는 심(心)-의(意)-식(識)의 의(意)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기능과 함께 인식주관인 육내입처를 구성합니다. 의(意)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SN 48.42-운나바 바라문 경)은 삶의 향상을 이끌기 위한 다른 측면의 의지를 설명하는데, 비교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 다섯 가지 기능 → 의(意) → 사띠 → 해탈 → 열반, 열반은 완성
한편, 여기의 의(意)를 의처(意處)의 의(意)로 이해한 것이 전통적 해석이라고 하겠는데, 이런 오해는 ‘뒤에 있는 마음’의 개념을 초래해서 유식(唯識)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단초가 됩니다. 그러나 니까야가 설명하는 마음은 이렇게 유식(唯識)이 설명하는 마음과 다릅니다. 그리고 니까야가 설명하는 마음이 불교를 대표하는 마음이라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3) 다섯 가지 기능의 유지 ― 서로 조건 되는 생명력(āyu)과 체열(usma)을 연(緣)하여 유지됨
※ 주제의 확장 ― (13)「무명과 번뇌의 서로 조건 됨 ─ 서로 조건 되는 네 가지 교리」☞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13
4) 생명력을 가진 것들(āyusaṅkhārā)과 경험되는 법들(vedaniyā dhammā) ― 경험되는 법들(vedaniyā dhammā)은 육외입처(六外入處)이어서 경험된 것(vedayita-受)과 다릅니다. vedaniyā는 vedeti의 grd(gerundive-미래수동분사)이고, vedayita는 pp(과거분사)여서 메커니즘 위에서 다른 위치를 지시합니다. 이때, 경험된 것(vedayita-受)은 viññātabbā dhammā(인식되어야 하는 법들)로 나타나는데, 내입처(內入處)에 의해 경험되는 법들(vedaniyā dhammā)[1차 인식]과 식(識)에 의해 인식되는 법들(viññātabbā dhammā)[2차 인식]의 구분입니다.
※ vijānāti[인식하다]의 격변화에 대한 메커니즘적 이해 - 답글 참조
생명력을 가진 것들[행(行)-saṅkhārā]은 생명력을 조건으로 하는 다섯 가지 기능 또는 그 의지처인 의(意)와 함께한 육내입처(六內入處)[인식주관]인데, 경험되는 법들 즉 육외입처(六外入處)[인식객관]와 함께 일체(一切)를 구성합니다.
이때, 경은 생명력을 가진 것들과 경험되는 법들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다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은 (SN 35.185-꼿티까 경)의 ‘내입처와 외입처는 서로에게 족쇄가 아니고, 이 둘을 연(緣)하여 생기는 욕탐(欲貪)이 족쇄’라는 설명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는 묶이지 않은 각각의 것인데, 공동주관인 욕탐(欲貪)에 묶여서 하나의 묶임 즉 같은 것이 되어있다는 설명입니다.
경은, 만약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비구에게 출정(出定)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수멸은, 삼매 상태에서, 공동주관인 욕탐의 근원인 상(想)의 멸(滅) 즉 누진(漏盡-번뇌의 부서짐) 상태로 진행되는 인식 과정에 의한 수(受)의 멸(滅)이어서, 무명(無明)에 조건 지어지지 않은 수(受)[해탈락(解脫樂)-열반락(涅槃樂)]의 실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묶어주는 족쇄로서의 욕탐 즉 공동주관의 참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수(受)의 멸(滅)은 내입처와 외입처의 활성화의 중단 즉 죽음을 의미하고, 수(受)의 멸(滅)의 상태를 증득한 수행자는 죽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님 즉 공동주관인 욕탐(欲貪)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상수멸(想受滅)은 상(想)의 멸(滅) 즉 공동주관이 족쇄로 작용하는 상태가 수행을 통해 해소된 것이어서 죽음이 아닌 해탈된 삼매의 상태이고, 살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출정(出定)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죽음 즉 몸이 무감각한 나무토막처럼 되는 경우를 생명력과 체열과 식(識)의 떠남으로 설명하는데, 역으로, 상수멸은 이 세 가지가 떠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편, 생명과 몸은 같은 것[단견(斷見)]도 아니고 다른 것[상견(常見)]도 아닙니다. 제3의 존재 상태 즉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廻)라고 설명되는 존재[유(有)-bhava]의 삶입니다. 반면에 생명력을 가진 것들과 경험되는 법들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력을 가진 것들인 육내입처의 나와 경험되는 법인 육외입처의 세상은 다른 것입니다.
[참고]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생명과 몸의 관계 ― (SN 44.7-목갈라나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10&wr_id=7
“kiṃ nu kho, bho moggallāna, 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 “abyākataṃ kho etaṃ, vaccha, bhagavatā — ‘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 “kiṃ pana, bho moggallāna,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 “etampi kho, vaccha, abyākataṃ bhagavatā —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
“목갈라나 존자여, 그 생명이 그 몸입니까?” “왓차여, ‘그 생명이 그 몸이다.’라는 것을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목갈라나 존자여, 다른 생명과 다른 몸입니까?” “왓차여, ‘다른 생명과 다른 몸이다.’라는 것도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견(常見)에 치우친 어떤 외도들은 생명과 몸은 다른 것 즉 아(我)와 몸을 구별하는 가운데 세상과는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서로 조건 됨에 의해 연기(緣起)로써 구성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으로의 나와 세상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가운데 불교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입니다. 만약 나와 세상이 같은 것이라면 어떤 노력에 의해서도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와 세상을 하나로 묶는 족쇄를 해소하면, 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해탈(解脫)이고, 불사(不死)와 열반(涅槃)의 실현이고, 깨달음입니다. 나와 세상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교는 명확한 지향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5) 죽은 자와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
그래서 죽은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수행자는 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이 그치고 진정된다는 공통점 위에서 생명력과 체열과 기능의 상태의 차별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는 생명력이 다하고 체열이 식고 기능들이 부서지지만, 상수멸을 증득한 수행자는 생명력이 다하지 않고 체열이 식지 않고 기능들이 아주 깨끗합니다. 즉 높은 수준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