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ūḷayamakavaggo, 7. vīmaṃsakasuttaṃ (MN 47-관찰자 경)
5. cūḷayamakavaggo, 7. vīmaṃsakasuttaṃ (MN 47-관찰자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관찰하는 비구가 다른 사람의 심(心)의 질서를 알지 못할 때 ‘정등각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서 여래에 대해 검증해야 한다.” “대덕이시여, 저희에게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관찰하는 비구가 다른 사람의 심(心)의 질서를 알지 못할 때, 안(眼)과 이(耳)로 인식해야 하는 두 가지 법에서 여래를 검증해야 한다. ―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있는가, 없는가?’라고.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안다.
검증하는 그 비구가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알 때 그다음의 것을 검증한다. ―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있는가, 없는가?’라고.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안다.
검증하는 그 비구가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알 때 그다음의 것을 검증한다. ―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는가, 없는가?’라고.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다.’라고 안다.
검증하는 그 비구가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다.’라고 알 때 그다음의 것을 검증한다. ― ‘이 존자는 이 유익한 법을 오랫동안 증득해 온 것인가 아니면 갓 증득한 것인가?’라고.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이 존자는 이 유익한 법을 오랫동안 증득해 왔지 갓 증득한 것이 아니다.’라고 안다.
검증하는 그 비구가 ‘이 존자는 이 유익한 법을 오랫동안 증득해 왔지 갓 증득한 것이 아니다.’라고 알 때 그다음의 것을 검증한다. ― ‘이 비구 존자는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어떤 위험들이 없는가?’라고. 비구들이여,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기 이전에는 비구에게 여기 어떤 위험들이 없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비구가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었을 때 여기 어떤 위험들이 있다.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이 비구 존자는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어떤 위험들이 없다.’라고 안다.
검증하는 그 비구가 ‘이 비구 존자는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어떤 위험들이 없다.’라고 알 때 그다음의 것을 검증한다. ― ‘이 존자는 두려움이 없이 삼가는가? 두려움 때문에 삼가는 것은 아닌가? 탐이 부서지고 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유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그것을 검증하는 비구는 ‘이 존자는 두려움이 없이 삼가지 두려움 때문에 삼가지 않는다. 탐이 부서지고 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유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 ‘그런데 존자에게 어떤 방식, 어떤 과정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이 존자는 두려움이 없이 삼가지 두려움 때문에 삼가지 않는다. 탐이 부서지고 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유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상가 안에 머물거나 홀로 머무는 이 존자가 있는데, 거기서 잘해나가는 사람들, 거기서 잘못해나가는 사람들, 거기서 무리를 지도하는 사람들, 물질을 좇아가는 여기 어떤 사람들, 물질의 오염에서 벗어난 여기 어떤 사람들을 이 존자는 그것 때문에 비난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세존의 곁에서 듣고 세존의 곁에서 받았습니다. ― ‘나는 두려움이 없이 삼간다. 두려움 때문에 삼가지 않는다. 나는 탐이 부서지고 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유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거기서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더 질문해야 한다. ―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여래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여래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여래는 ‘안과 이로 인식해야 하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다. 나는 이 길을 가졌고, 이 영역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것에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제자는 법을 듣기 위해 이렇게 주장하는 스승에게 가야 한다. 스승은 그에게 악과 선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스승이 비구에게 악과 선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거듭 설하는 대로 그는 거듭 그 법을 실답게 안 뒤에 법들 가운데서 여기 어떤 법에 대해 결론을 얻는다. ― ‘세존은 정등각이시다. 세존으로부터 법은 잘 설해졌다. 상가는 잘 실천한다.’라고 스승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 ‘그런데 존자에게 어떤 방식, 어떤 과정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 ‘세존은 정등각이시다. 세존으로부터 법은 잘 설해졌다. 상가는 잘 실천한다.’라고 말합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여기, 도반들이여, 나는 법을 듣기 위해 세존에게 갔습니다. 그런 나에게 세존은 악과 선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설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이 나에게 악과 선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거듭 설하는 대로 나는 그 법들을 실답게 안 뒤에 여기 법들 가운데서 어떤 법에 대해 결론을 얻었습니다. ― ‘세존은 정등각이시다. 세존으로부터 법은 잘 설해졌다. 상가는 잘 실천한다.’라고 스승에 대해 분명해졌습니다.’라고.
누구든지, 비구들이여, 이런 방식과 이런 구문들과 이런 표현들로서 여래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뿌리내리고, 확립하면, 이것이, 비구들이여,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이나 세상의 누구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 합리적이고 견(見)의 뿌리이고 확고한 믿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여래에 대해 법답게 검증한다. 그리고 여래에 대해 법의 성품에 따르는 고른 결론을 얻는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