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sekhasuttaṃ (MN 53-유학(有學) 경)
1. gahapativaggo, 3. sekhasuttaṃ (MN 53-유학(有學)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의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새 강당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때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대덕이시여,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의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새 강당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그것을 처음 사용해 주십시오. 세존께서 먼저 사용하시고 나중에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것은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에게 오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세존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러자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세존의 동의를 알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뒤에 새 강당으로 갔다. 가서는 강당을 덮개로 완전하게 덮고 자리를 준비하고 물 항아리를 마련하고 기름 등불을 매달고서 세존께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은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강당을 덮개로 완전하게 덮고 자리를 준비하고 물 항아리를 마련하고 기름 등불을 매달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가실 시간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세존은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비구 상가와 함께 새 강당으로 갔다. 가서는 발을 씻고 강당으로 들어가서 중간 기둥 곁에 동쪽을 향하여 앉았다. 비구 상가도 발을 씻고 강당으로 들어가서 서쪽 벽 근처에 동쪽을 향하여 세존을 앞에 모시고 앉았다.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도 역시 발을 씻고 강당으로 들어가서 서쪽 벽 근처에 동쪽을 향하여 세존을 앞에 모시고 앉았다.
그러자 세존은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에게 늦은 밤까지 법의 말씀으로 설명하고 격려하고 분명히 하고 기쁘게 한 뒤 아난다 존자에게 “아난다여, 까삘라왓투에 사는 사꺄들에게 유학(有學)의 길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 들려주어라. 나는 등이 아프다. 그래서 누어야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존은 대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편 뒤에 발에 발을 포개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일어남의 상(想)을 작의하고서 오른쪽으로 사자처럼 누웠다.
• avassutapariyāyasuttaṃ (SN 35.243-흘러나옴의 방식 경) 참조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계(戒)를 갖추고,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고,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일곱 가지 정법(正法)을 갖추고,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心)인 네 가지 선(禪)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습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계를 갖춥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계를 갖춥니다. 계목(戒目)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합니다. 이렇게,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계를 갖춥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합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것(受)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 안근(眼根)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단속을 위해 실천합니다. 안근을 보호하고, 안근에서 단속합니다.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닿으면서 …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것(受)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 의근(意根)을 단속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단속을 위해 실천합니다. 의근을 보호하고, 의근에서 단속합니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합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압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사실에 들어맞게[여리(如理)] 가늠하면서 음식을 먹습니다. ― ‘달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여분을 위해서도 아니고, 꾸밈을 위해서도 아니고, 장식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이 몸을 유지할 영양을 위한 만큼, 해침을 자제할 만큼, 범행에 도움이 되기 위한 만큼. 이렇게 나는 이전의 느낌을 부수고,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삶은 흠 잡을 데 없고, 안락한 생활양식이 유지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압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깨어있음을 실천합니까?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 동안에는 경행(輕行)을 수반한 앉음을 통해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심(心)을 청정케 합니다. 밤의 초삼분(初三分) 동안에는 경행을 수반한 앉음을 통해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심을 청정케 합니다. 밤의 중삼분(中三分) 동안에는 발에 발을 포개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일어남의 상(想)을 작의한 후 오른쪽으로 사자처럼 눕습니다. 밤의 후삼분(後三分) 동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행을 수반한 앉음을 통해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심을 청정케 합니다. 이렇게,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깨어있음을 실천합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일곱 가지 정법을 갖춥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을 가집니다.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여래(如來)의 깨달음을 믿습니다. 히리를 가집니다. 몸의 나쁜 행위와 말의 나쁜 행위와 의(意)의 나쁜 행위에 대한 자책(自責)을 두려워하고, 악한 불선법들의 성취에 대한 자책(自責)을 두려워합니다. 옷땁빠를 가집니다. 몸의 나쁜 행위와 말의 나쁜 행위와 의(意)의 나쁜 행위에 대한 타책(他責)을 두려워하고, 악한 불선법들의 성취에 대한 타책(他責)을 두려워합니다.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명심하고, 배운 것을 쌓습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들과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선언하는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의(意)로써 이어보고 견해로써 잘 꿰뚫습니다. 불선법들의 버림을 위해, 선법들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정진하면서 머뭅니다. 선법들에 대해 열정적이고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입니다. 사띠를 가집니다. 최상의 사띠와 신중함을 갖추어 오래전에 행한 것에게도, 오래전에 말한 것에게도 다가가서 기억합니다. 지혜를 가집니다. 자라남-줄어듦으로 이끌고, 성스러운 꿰뚫음에 의해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지혜를 갖춥니다. 이렇게,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일곱 가지 정법을 갖춥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心)인 네 가지 선(禪)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습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렇게,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인 네 가지 선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습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계(戒)를 갖추고, 이렇게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고, 이렇게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이렇게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이렇게 일곱 가지 정법을 갖추고, 이렇게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인 네 가지 선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을 때,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유학의 길을 따라 건강하게 태어났다고 불립니다. 높이 염오 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하나마여, 암탉에게 여덟 또는 열 또는 열두 개의 알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암탉에 의해 바르게 품어지고, 바르게 열을 받고, 바르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 암탉에게 ‘참으로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알의 껍질을 깨고 안전하게 태어나기를!’이라는 원함이 생기지 않을지라도 그 병아리들이 발톱 끝이나 부리로 알의 껍질을 깨고 안전하게 태어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처럼,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계(戒)를 갖추고, 이렇게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고, 이렇게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이렇게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이렇게 일곱 가지 정법을 갖추고, 이렇게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인 네 가지 선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을 때,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유학의 길을 따라 건강하게 태어났다고 불립니다. 높이 염오 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위없는 유가안온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마하나마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줄어들고 자라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합니다.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이것이 세상에 대한 첫 번째 높은 염오(厭惡)입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마하나마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이것이 세상에 대한 두 번째 높은 염오(厭惡)입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마하나마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이것이 세상에 대한 세 번째 높은 염오(厭惡)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계(戒)를 갖추는 것도 실천[행(行)]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는 것도 실천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음식의 적당량을 아는 것도 실천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것도 실천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일곱 가지 정법(正法)을 갖추는 것도 실천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인 네 가지 선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는 것도 실천입니다.
그리고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는 것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하는 것도 밝음[명(明)]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보는 것 …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아는 것도 밝음입니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무는 것도 밝음입니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밝음[명(明)]을 갖췄고, 이렇게 실천[행(行)]을 갖췄고, 이렇게 밝음과 실천을 갖췄다[명행족(明行足)]고 불립니다.
‘khattiyo seṭṭho janetasmiṃ, ye gottapaṭisārino.vijjācaraṇasampanno, so seṭṭho devamānuse’ti.
마하나마여, 사낭꾸마라 범천(梵天)이 이 게송이 말했습니다. ―
‘가문을 의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가 으뜸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는 명행족(明行足), 그가 으뜸이다.’라고.
마하나마여, 사낭꾸마라 범천이 말한 이 게송은 잘 읊은 것이지 잘못 읊은 것이 아닙니다. 잘 말한 것이지 잘못 말한 것이 아니고, 의미를 갖춘 것이지 의미를 갖추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도 동의하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일어나서 아난다 존자에게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그대는 까삘라왓투에 사는 삭까들에게 유학(有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아난다 존자가 말하고 스승은 인정했다. 까삘라왓투에 사는 삭까들은 즐거워하면서 아난다 존자의 말씀을 기뻐했다.
sekhasuttaṃ niṭṭhitaṃ tatiyaṃ.
세 번째인 유학 경이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