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aliyasuttaṃ (MN 54-뽀딸리야 경) ㅡ 46~50
예를 들면, 장자여, 어떤 사람이 꿈꾸는 동안 마음에 드는 공원과 마음에 드는 숲과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연목을 볼 것이다. 꿈에서 깬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ㅡ ‘꿈의 비유로서 세존에 의해 말해진 소유의 삶은 괴로움이 많고, 절망이 많다. 여기에 위험은 더 많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된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어떤 사람이 세련된 수레와 진귀한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빌린 뒤에 그 빌린 물품들로 치장하고 시장에 갈 것입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이 보고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ㅡ ‘존자들이여,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부자들은 이렇게 재물을 즐깁니다.’라고. 이런 그를 주인이 어디서든 볼 것이고 거기서 그것들을 가져갈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에게 변화가 있을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taṃ kissa hetu”?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덕이시여, 주인들이 자기의 것들을 가져갔습니다.”
“그와 같이,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ㅡ ‘빌린 물건의 비유로서 세존에 의해 말해진 소유의 삶은 괴로움이 많고, 절망이 많다. 여기에 위험은 더 많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된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마을이나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울창한 숲이 있습니다. 거기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과일나무가 있는데 어떤 열매들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과일을 원하고 과일을 구하고 과일을 찾아 움직이는 어떤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는 그 숲 깊숙이 들어온 뒤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나무를 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ㅡ ‘이 과일 나무는 잘 익고 열매가 많은데 땅에 떨어진 열매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무에 올라갈 줄 안다. 나무에 올라가서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에 채워야겠다.’라고. 그는 나무에 올라가서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에 채울 것입니다. 그때 과일을 원하고 과일을 구하고 과일을 찾아 움직이는 두 번째 사람이 날이 선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는 그 숲 깊숙이 들어온 뒤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나무를 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ㅡ ‘이 과일 나무는 잘 익고 열매가 많은데 땅에 떨어진 열매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무에 올라갈 줄 모른다. 이 나무를 뿌리로부터 자른 뒤에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를 채워야겠다.’라고. 그는 그 나무를 뿌리로부터 자를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나무에 올라간 먼저 사람이 재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나무가 넘어질 때 손이 부러지거나 발이 부러지거나 다른 부분들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와 같이,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ㅡ ‘나무열매의 비유로서 세존에 의해 말해진 소유의 삶은 괴로움이 많고, 절망이 많다. 여기에 위험은 더 많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된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장자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오직 아런 최상의 사념청정(捨念淸淨)을 가진 뒤에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합니다. 즉 ㅡ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ㅡ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합니다.
장자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오직 아런 최상의 사념청정(捨念淸淨)을 가진 뒤에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수승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ㅡ ‘이들은 신(身)으로 나쁜 삶을 살고 구(口)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의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신(身)으로 좋은 삶을 살고 구(口)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의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수승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장자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오직 아런 최상의 사념청정(捨念淸淨)을 가진 뒤에 번뇌들의 부숨으로부터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장자여, 이만큼이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의한 모든, 모든 방법에 의한 모든 삶의 놓음입니다.
장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의한 모든, 모든 방법에 의한 모든 삶의 놓음이 있듯이 그대도 이러한 삶의 놓음을 자신에게서 관찰합니까?”
“대덕이시여, 어떻게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 있는 모든 것에 의한 모든, 모든 방법에 의한 모든 삶의 놓음이 있겠습니까? 대덕이시여, 저는 성스러운 율에 있는 모든 것에 의한 모든, 모든 방법에 의한 모든 삶의 놓음에서 멀리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전에 저희는 외도 유행승들을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렸고,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의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덕이시여, 저희는 비구들을 좋은 가문인데도 좋은 가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좋은 가문인데도 좋지 않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렸고, 좋은 가문인데도 좋지 않은 가문의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덕이시여, 이제 저희는 좋은 가문이 아닌 외도 유행승들을 사실대로 좋은 가문이 아니라고 알 것입니다. 안 좋은 가문에 맞는 안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릴 것입니다. 안 좋은 가문에 맞는 안 좋은 가문을 모시는 자리에 모실 것입니다. 그리고 대덕이시여, 좋은 가문인 비구들을 사실대로 좋은 가문이라고 알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맞는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릴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맞는 좋은 가문을 모시는 자리에 모실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사문에 대한 애정, 사문에 대한 믿음, 사문에 대한 존경을 알게 하셨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예를 들면, 대덕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덕이시여, 세존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께 귀의하고, 법과 비구상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남신자로 받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