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upālisuttaṃ (MN 56-우빨리 경) 56-69
1. gahapativaggo, 6. upālisuttaṃ (MN 56-우빨리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날란다에서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머물렀다.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도 니간타의 큰 집단과 함께 날란다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날란다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온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빠와리까의 망고 숲으로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세존은 “따빳시여, 자리가 있습니다. 원한다면 앉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어떤 낮은 자리를 택해서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세존은 “따빳시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몇 개의 업을 선언합니까?”라고 말했다.
“도반 고따마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업(業)-업’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때림, 때림’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따빳시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몇 개의 때림을 선언합니까?”
“도반 고따마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세 개의 때림을 선언하는데, 몸의 때림, 말의 때림, 의(意)의 때림입니다.”
“그러면 따빳시여, 몸의 때림, 말의 때림, 의(意)의 때림은 다릅니까?”
“도반 고따마여, 몸의 때림, 말의 때림, 의(意)의 때림은 다릅니다.”
“따빳시여, 이렇게 분류되고 이렇게 고유한 이런 세 가지 때림 가운데 어떤 때림에 대해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다고 선언합니까? 몸의 때림입니까 아니면 말의 때림입니까 아니면 의(意)의 때림입니까?”
“도반 고따마여, 이렇게 분류되고 이렇게 고유한 이런 세 가지 때림 가운데 몸의 때림에 대해 니간타 나따뿟따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까?”
“도반 고따마여, 나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까?”
“도반 고따마여, 나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빳시여, 그대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까?”
“도반 고따마여, 나는 몸의 때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존은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해 세 번에 걸쳐 확인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러면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몇 개의 때림을 선언합니까?”
“따빳시여, 여래는 ‘때림-때림’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따빳시여, 여래는 ‘업(業)-업’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몇 개의 업을 선언합니까?”
“따빳시여, 나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세 개의 업을 선언하는데, 몸의 업, 말의 업, 의(意)의 업입니다.”
“그러면 도반 고따마여, 몸의 업, 말의 업, 의(意)의 업은 다릅니까?”
“따빳시여, 몸의 업, 말의 업, 의(意)의 업은 다릅니다.”
“도반 고따마여, 이렇게 분류되고 이렇게 고유한 이런 세 가지 업 가운데 어떤 업에 대해 그대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다고 선언합니까? 몸의 업입니까 아니면 말의 업입니까 아니면 의(意)의 업입니까?”
“따빳시여, 이렇게 분류되고 이렇게 고유한 이런 세 가지 업 가운데 의(意)의 업에 대해 나는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몸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말의 업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그대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까?”
“따빳시여, 나는 의(意)의 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여래에게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해 세 번에 걸쳐 확인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갔다.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우빨리를 우두머리로 하는 발라까에서 온 재가자의 큰 집단과 함께 앉아있었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멀리서 오고 있는 니간타 디가따빳시를 보았다. 보고서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따빳시여, 이제 그대는 한낮에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말했다. “대덕이시여, 저는 지금 사문 고따마의 곁에서 옵니다.” “그러면 따빳시여, 그대는 사문 고따마와 어떤 것이든 우정의 대화를 나누었는가?” “대덕이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와 어떤 우정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따빳시여, 그대가 사문 고따마와 나눈 우정의 대화는 어떤 것인가?” 그러자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세존과 함께한 우정의 대화를 그대로 모두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훌륭하고 훌륭하다, 따빳시여!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운 제자답게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사문 고따마에게 적절히 설명했다. 어떻게 낮은 의(意)의 때림이 이렇게 이 거친 몸의 때림과 비교하여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우빨리 장자가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대덕 디가따빳시여!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운 제자답게 존경하는 따빳시께서는 사문 고따마에게 적절히 설명하셨습니다. 어떻게 낮은 의(意)의 때림이 이렇게 이 거친 몸의 때림과 비교하여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습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제, 대덕이시여, 제가 사문 고따마에게 가서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한 말을 논파하겠습니다. 만약 사문 고따마가 존경하는 따빳시께 확인한 것처럼 저에게 확인한다면, 예를 들면, 힘센 사람이 머리털이 긴 숫양의 머리털을 잡고서 밀고 당기고 이리저리 휘두를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대화를 하면서 사문 고따마를 밀고 당기고 이리저리 휘두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힘센 술 담는 일꾼이 큰 깔개를 깊은 물 항아리에 담근 뒤에 귀퉁이에서 잡고서 밀고 당기고 이리저리 휘두를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대화를 하면서 사문 고따마를 밀고 당기고 이리저리 휘두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힘센 술주정뱅이가 술주전자를 귀퉁이에서 잡고서 흔들어 떨어뜨리고 팽개치고 두들겨 부술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대화를 하면서 사문 고따마를 흔들어 떨어뜨리고 팽개치고 두들겨 부술 것입니다. 예를 들면, 60년 된 코끼리가 깊은 호수에 들어가 대마 씻는 놀이로 놀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생각건대, 사문 고따마에게 대마 씻는 놀이로 놀 것입니다.(*) 이제, 대덕이시여, 제가 사문 고따마에게 가서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한 말을 논파하겠습니다.”라고. “그대는 가시오, 장자여,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한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시오. 참으로 장자여, 나거나 니간타 디가따빳시거나 그대는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할 수 있소.”
(*) (MN 35-삿짜까 짧은 경)에 같은 비유가 나타남.
이렇게 말했을 때,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대덕이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대덕이시여, 사문 고따마는 외도의 제자들을 개종하게 하는 요술을 아는 요술쟁이입니다.”라고 말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그대는 가시오, 장자여,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한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시오. 참으로 장자여, 나거나 니간타 디가따빳시거나 그대는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할 수 있소.” 두 번째도 따빳시는 … 세 번째도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대덕이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대덕이시여, 사문 고따마는 외도의 제자들을 개종하게 하는 요술을 아는 요술쟁이입니다.”라고 말했다. “따빳시여,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경우가 아니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문 고따마가 우빨리 장자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그대는 가시오, 장자여, 이런 대화의 주제에 대한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시오. 참으로 장자여, 나거나 니간타 디가따빳시거나 그대는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할 수 있소.”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우빨리 장자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뒤 빠와리까 망고 숲으로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우빨리 장자는 세존에게 “대덕이시여, 참으로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여기에 왔었습니까?”
(*) 개종시키는 요술쟁이의 용례 → (AN 4.193-밧디야 경) ― 「‘māyāvī samaṇo gotamo āvaṭṭaniṃ māyaṃ jānāti yāya aññatitthiyānaṃ sāvake āvaṭṭetī’ti ‘사문 고따마는 외도의 제자들을 개종시키는 요술을 아는 요술쟁이다.」
“장자여, 참으로 니간타 디가따빳시가 여기에 왔었습니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대덕께서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함께 어떤 것이든 우정의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장자여, 나는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함께 어떤 우정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대덕께서 사문 고따마와 나눈 우정의 대화는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세존은 니간타 디가따빳시와 함께한 우정의 대화를 그대로 모두 우빨리 장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우빨리 장자가 세존에게 “대덕이시여, 따빳시는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운 제자답게 니간타 디가따빳시는 세존에게 적절히 설명했습니다. 어떻게 낮은 의(意)의 때림이 이렇게 이 거친 몸의 때림과 비교하여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습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장자여, 만약 그대가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나는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합시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병에 걸려 낙담하고 심하게 아픈 니간타가 찬물을 거부하고 더운물만 수용할 것입니다. 그가 찬물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여, 이 사람이 어디에 태어난다고 니간타 나따뿟따는 선언합니까?”
“대덕이시여, 의(意)에 묶인 자들이라는 신(神)들이 있어서 그는 거기에 태어납니다.”
“taṃ kissa hetu”?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덕이시여, 그러그러한 의(意)에 묶인 채 죽었습니다.”
“사고하십시오, 장자여, 사고한 뒤에, 장자여, 설명하십시오. 그대는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뒤의 말에서 앞의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장자여, 그대는 ‘대덕이시여, 나는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습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여기 네 가지 단속으로 단속하는 니간타 나따뿟따는 모든 물을 금하고, 모든 물을 지배하고, 모든 물을 제거하고, 모든 물을 고루 미치게 합니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 많은 작은 생명을 죽입니다. 그러면 장자여, 이것에 대해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떤 보(報)를 말합니까?”
“대덕이시여, 의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니간타 나따뿟따는 큰 결점이 없다고 말합니다.”
“sace pana, gahapati, cetetī”ti?
“장자여, 만약에 의도하면 어떻습니까?”
“mahāsāvajjaṃ, bhante, hotī”ti.
“대덕이시여, 큰 결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장자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의도를 어디에 속한다고 말합니까?”
“manodaṇḍasmiṃ, bhante”ti.
“의(意)의 때림에 속합니다, 대덕이시여.”
“사고하십시오, 장자여, 사고한 뒤에, 장자여, 설명하십시오. 그대는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뒤의 말에서 앞의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장자여, 그대는 ‘대덕이시여, 나는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습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이곳 날란다는 번성하고, 풍요롭고, 인구가 많고,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까?”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곳 날란다는 번성하고, 풍요롭고, 인구가 많고,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여기 칼을 든 어떤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나는 여기 날란다에 있는 생명을 한순간 한 찰나에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참으로 그 사람이 여기 날란다에 있는 생명을 한순간 한 찰나에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열 사람이라도, 대덕이시여, 스무 사람이라도, 대덕이시여, 서른 사람이라도, 대덕이시여, 마흔 사람이라도, 대덕이시여, 쉰 사람이라도, 대덕이시여, 여기 날란다에 있는 생명을 한순간 한 찰나에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잘것없는 한 사람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여기 신통이 있고 심(心)이 숙달된 사문이나 바라문이 올 것입니다. 그가 ‘나는 한 번의 의(意)의 분노로써 이 날란다를 재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신통이 있고 심(心)이 숙달된 그 사문이나 바라문이 한 번의 의(意)의 분노로써 이 날란다를 재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열 개의 날란다라도, 대덕이시여, 스무 개의 날란다라도, 대덕이시여, 서른 개의 날란다라도, 대덕이시여, 마흔 개의 날란다라도, 대덕이시여, 쉰 개의 날란다라도, 대덕이시여, 그 신통이 있고 심(心)이 숙달된 사문이나 바라문이 한 번의 의(意)의 분노로써 날란다들을 재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잘것없는 하나의 날란다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고하십시오, 장자여, 사고한 뒤에, 장자여, 설명하십시오. 그대는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뒤의 말에서 앞의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장자여, 그대는 ‘대덕이시여, 나는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몸의 때림이 악업을 행하고, 악업의 결과를 부르는 더 큰 결점이 있습니다. 말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니고, 의(意)의 때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그대는 단다까 숲, 깔링가 숲, 맛자 숲, 마땅가 숲 등의 숲을 숲이 되게 함에 대해 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나는 단다까 숲, 깔링가 숲, 맛자 숲, 마땅가 숲 등의 숲을 숲이 되게 함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들었습니까? 무엇에 의해서 그 단다까 숲, 깔링가 숲, 맛자 숲, 마땅가 숲 등의 숲을 숲이 되게 하였습니까?”
“이렇게 나는 들었습니다, 대덕이시여. 어떤 선인의 의(意)의 분노 때문에 그 단다까 숲, 깔링가 숲, 맛자 숲, 마땅가 숲 등의 숲은 숲이 되었습니다.”
“사고하십시오, 장자여, 사고한 뒤에, 장자여, 설명하십시오. 그대는 앞의 말에서 뒤의 말이, 뒤의 말에서 앞의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장자여, 그대는 ‘대덕이시여, 나는 사실에 입각한 대화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화를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대덕이시여, 나는 세존의 앞의 비유에 의해 즐겁고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 나는 세존을 휘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예를 들면, 대덕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世尊)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의지처인 세존(世尊)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세존(世尊)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장자여, 잘 알고 나서 행해야 합니다. 그대처럼 잘 알려진 사람은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덕이시여, ‘장자여, 잘 알고 나서 행해야 합니다. 그대처럼 잘 알려진 사람은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저에게 말씀하신 것에 의해 저는 세존께 더욱 즐겁고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외도의 제자들은 저를 제자로 얻으면 ‘우빨리 장자가 우리의 제자가 되었다.’라며 날란다 전체에 깃발을 들고 나를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장자여, 잘 알고 나서 행해야 합니다. 그대처럼 잘 알려진 사람은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대덕이시여, 이런 저는 두 번째도 의지처인 세존(世尊)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세존(世尊)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참으로 장자여, 오랫동안 그대의 가문은 니간타들에게 원하는 것을 채워 주는 샘이었다. 찾아오는 그들에게 그대의 가문은 공양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대덕이시여, ‘장자여, 오랫동안 그대의 가문은 니간타들에게 원하는 것을 채워 주는 샘이었다. 찾아오는 그들에게 그대의 가문은 공양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저에게 말씀하신 것에 의해 저는 세존께 더욱 즐겁고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는 ‘오직 나에게만 공양물이 주어지고, 오직 나의 제자들에게만 공양물이 주어져야 한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것이 큰 결실이 있고 다른 곳에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 오직 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큰 결실이 있고, 다른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에는 큰 결실이 없다.’라고 말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저에게 니간타들에 대한 보시도 권유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니 저희는 여기에서 적당한 때를 알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런 저는 세 번째도 세존께 귀의하고, 법과 비구 상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은 우빨리 장자에게 순서대로의 가르침을 설했다. 보시(布施)의 가르침, 계(戒)의 가르침, 천상(天上)의 가르침, 소유의 삶의 위험과 저열함과 오염, 출리(出離)에 대한 이익을 설명했다. 세존은 우빨리 장자의 심(心)이 준비되고, 부드러워지고, 장애에서 벗어나고, 높아지고, 고와진 것을 아셨을 때, 부처님들의 찬탄 받는 설법인 고(苦)-집(集)-멸(滅)-도(道)를 설명했다. 예를 들면, 얼룩이 없는 깨끗한 천은 색깔을 잘 받을 것이다. 이처럼 그 자리에서 우빨리 존자에게 ‘무엇이든지 자라나는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법안(法眼)]이 생겼다. 그렇게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관통하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확신을 얻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게 된 우빨리 장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이제 저희는 가겠습니다. 의무가 많은 저희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장자여, 그대에게 적당한 시간을 이제 그대가 생각하라.”
(*) 우빨리 장자의 귀의 장면 → (AN 8.12-시하 경)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