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ṇṇakasuttaṃ (MN 60-흠 없음 경) 1(92-102)
1. gahapativaggo, 10. apaṇṇakasuttaṃ (MN 60-흠 없음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꼬살라에서 큰 비구 상가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던 세존은 살라라는 바라문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살라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은 들었다. — “존자들이여, 큰 비구 상가와 함께 꼬살라에서 돌아다니면서 사는, 사꺄의 자손이고 사꺄 가문으로부터 출가한 사문 고따마가 살라에 도착했습니다. 참으로 세존이신 그분 고따마에게는 이런 좋은 명성이 퍼져있습니다. —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그는 신과 함께하고 마라와 함께하고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과 사문-바라문과 함께하고 신과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를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선언합니다.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고,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드러냅니다. 참으로 그런 아라한을 뵙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그러자 살라에 사는 바라문 장자들은 세존에게 갔다. 가서 어떤 사람들은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에게 합장하여 인사한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의 앞에서 이름과 성을 말하고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한 곁에 앉았다.
• apaṇṇaka: true; faultless. (adj.)
• ākāravant (adj.) [fr. ākāra] having a reason, reasonable, founded
한 곁에 앉은 살라의 바라문 장자들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믿음을 얻을만한 이유가 있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누구라도 있습니까?” “대덕이시여, 저희에게는 믿음을 얻을만한 이유가 있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습니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에 드는 스승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 흠 없는 법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자들이여, 참으로 흠 없는 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 그대들에게 오랜 시간 이익과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들이여, 무엇이 흠 없는 법입니까?
장자들이여,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①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봉헌도 없다. ②선행과 악행의 업들에게 과도 없고 보도 없다. ③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④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⑤화생하는 중생은 없다. ⑥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라고. 장자들이여,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정반대의 주장을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①보시도 있고 제사도 있고 봉헌도 있다. ②선행과 악행의 업들에게 과도 있고 보도 있다. ③이 세상도 있고 저세상도 있다. ④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⑤화생하는 중생은 있다. ⑥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있다.’라고. 장자들이여, ‘이 사문-바라문들은 서로 간에 정반대의 주장을 가졌다.’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덕이시여.”
“장자들이여, 거기서 ‘①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봉헌도 없다. ②선행과 악행의 업들에게 과도 없고 보도 없다. ③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④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⑤화생하는 중생은 없다. ⑥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善法)들을 버린 뒤에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不善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出離)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보지 못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없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없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삿된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삿된 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저세상을 아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없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正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봅니다. 이렇게 이전의 좋은 계행(戒行)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성자에게 반대하는 행위,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봄입니다. 이렇게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이 생깁니다.
• akusalānaṃ dham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ṃkiles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vodānapakkhaṃ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봅니다. ―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MN 60-흠 없음 경)
•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
• kāmaŋ acc. as adv. (a) yathā kāmaŋ according to inclination, at will, as much as one chooses; yena kāmaŋ wherever he likes, just as he pleases
(b) willingly gladly, let it be that, usually with imper.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저세상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안전한 자신을 만들 것이다.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저세상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戒)를 경시하고, 삿된 견해를 가져서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지 못하게 실천하는 자는 유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한쪽 부분만 채우고 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①보시도 있고 제사도 있고 봉헌도 있다. ②선행과 악행의 업(業)들에게 과도 있고 보도 있다. ③이 세상도 있고 저세상도 있다. ④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⑤화생하는 중생은 있다. ⑥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있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들을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있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있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바른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른 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저세상을 아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저세상에 대해 ‘저세상은 있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전의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성자에게 반대하지 않는 행위,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선법들이 생깁니다.
• aneke kusalā dhammā 다양한 선법들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저세상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戒)를 중시하고, 바른 견해를 가져서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으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는 무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양쪽 부분을 채우고 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는 자, 살육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는 자, 보시하게 하는 자, 자선을 베푸는 자, 자선을 베풀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라고,
장자들이여,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정반대의 주장을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진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든다면 그것 때문에 악이 있고, 악의 결과가 있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는 자, 살육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악이 있고, 악의 결과가 있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는 자, 보시하게 하는 자, 자선을 베푸는 자, 자선을 베풀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가 있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가 있다.'라고. 장자들이여, ‘이 사문-바라문들은 서로 간에 정반대의 주장을 가졌다.’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덕이시여.”
“장자들이여, 거기서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는 자, 살육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는 자, 보시하게 하는 자, 자선을 베푸는 자, 자선을 베풀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들을 버린 뒤에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보지 못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없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없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삿된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삿된 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실 있음을 말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없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봅니다. 이렇게 이전의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성자에게 반대하는 행위,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봄입니다. 이렇게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이 생깁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결실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안전한 자신을 만들 것이다. 만약 결실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결실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戒)를 경시하고, 삿된 견해를 가져서 결실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결실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지 못하게 실천하는 자는 유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한쪽 부분만 채우고 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진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든다면 그것 때문에 악이 있고, 악의 결과가 있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는 자, 살육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악이 있고, 악의 결과가 있다.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는 자, 보시하게 하는 자, 자선을 베푸는 자, 자선을 베풀게 하는 자에게 그것 때문에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가 있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있고, 공덕의 결과가 있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不善法)들을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있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있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바른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른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실 있음을 말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결실에 대해 ‘결실이 있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전의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성자에게 반대하지 않는 행위,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선법들이 생깁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결실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결실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를 중시하고, 바른 견해를 가져서 결실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결실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는 무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양쪽 부분을 채우고 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 없음-조건 없음으로부터 중생들은 오염된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 없음-조건 없음으로부터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의 활력도 없고, 남자의 분발도 없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삶은 권한도 없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종(種)과 본성에 의해 익어서 오직 여섯 태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라고,
장자들이여,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정반대의 주장을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하여 중생들은 오염된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하여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힘도 있고, 정진도 있고, 남자의 활력도 있고, 남자의 분발도 있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삶은 권한도 없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종과 본성에 의해 익어서 오직 여섯 태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장자들이여, ‘이 사문-바라문들은 서로 간에 정반대의 주장을 가졌다.’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덕이시여.”
“장자들이여, 거기서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 없음-조건 없음으로부터 중생들은 오염된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 없음-조건 없음으로부터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의 활력도 없고, 남자의 분발도 없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삶은 권한도 없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종과 본성에 의해 익어서 오직 여섯 태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들을 버린 뒤에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보지 못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없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없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삿된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삿된 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원인을 말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없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봅니다. 이렇게 이전의 좋은 계행은 버려지고, 나쁜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성자에게 반대하는 행위, 정법 아닌 것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얕봄입니다. 이렇게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이 생깁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원인이 없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진 뒤 안전한 자신을 만들 것이다.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원인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를 경시하고, 삿된 견해를 가져서 원인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지 못하게 실천하는 자는 유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한쪽 부분만 채우고 서 있습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하여 중생들은 오염된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다. 원인과 함께 조건과 함께하여 중생들은 청정해진다. 힘도 있고, 정진도 있고, 남자의 활력도 있고, 남자의 분발도 있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삶은 권한도 없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종(種)과 본성에 의해 익어서 오직 여섯 태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이런 것이 기대됩니다. 즉 몸의 나쁜 행위, 말의 나쁜 행위, 의(意)의 나쁜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불선법들을 버린 뒤에 몸의 좋은 행위, 말의 좋은 행위, 의(意)의 좋은 행위라는 이런 세 가지 선법들을 받아들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불선법들의 위험과 퇴보와 오염 그리고 선법들을 위한 출리에서 이익과 깨끗한 측면을 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있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있다’라고 사유합니다. 그것은 바른 사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른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원인을 말하는 아라한들에게 반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원인이 있다’라고 남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정법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전의 나쁜 계행은 버려지고, 좋은 계행이 존재하게 됩니다. — 이것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성자에게 반대하지 않는 행위, 정법을 설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얕보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이런 다양한 선법들이 생깁니다.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어서 원인이 없다고 쳐보자. 그래도 이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계를 중시하고, 바른 견해를 가져서 원인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라고.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지금여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양면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흠 없는 법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는 무익한 경우를 배제하고, 양쪽 부분을 채우고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