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addālisuttaṃ (MN 65-밧달리 경) ㅡ 밧달리의 참회
2. bhikkhuvaggo, 5. bhaddālisuttaṃ (MN 65-밧달리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ㅡ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이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ㅡ “비구들이여, 나는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는다. 비구들이여,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는 나는 압박 없음과 병 없음과 가벼움과 힘과 편히 머묾을 함께 안다[상(想)한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어라. 비구들이여,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먹는 그대들도 압박 없음과 병 없음과 가벼움과 힘과 편히 머묾을 함께 알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밧달리 존자가 세존에게 “대덕이시여, 저는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는 저에게 후회와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밧달리여, 그대는 초청 받은 곳에서 일부를 먹은 뒤에 일부를 가지고 온 뒤에 먹어도 좋다. 밧달리여, 이렇게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먹는 그대도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도, 대덕이시여, 저는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자리에서하루에 한 번음식을 먹는 저에게 후회와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밧달리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밧달리 존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삼 개월 내내 세존의 곁에 오지 않았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 달이 지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는 여정을 떠나실 것이다.’라면서 세존을 위해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밧달리 존자가 그 비구들에게 왔다. 와서는 그 비구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밧달리 존자에게 그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ㅡ “도반 밧달리여, 세존을 위해 이 가사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세 달이 지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는 여정을 떠나실 것입니다. 오십시오, 도반 밧달리여, 결점이 되는 이것을 잘 사고하십시오. 나중에 더 어려움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밧달리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밧달리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잘못이 저를 정복했습니다[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저에게,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놓아주십시오[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라고.
“밧달리여, 참으로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에 의해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그대는, 밧달리여, ‘세존은 사왓티에 머문다. 세존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밧달리여, ‘많은 비구들이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밧달리여, ‘많은 비구니들이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밧달리여, ‘많은 남신자들이 사왓티에 산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밧달리여, ‘많은 여신자들이 사왓티에 산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밧달리여, ‘많은 외도의 사문-바라문들이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밧달리 비구,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어떤 장로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덕이시여,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저에게,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라고.
“밧달리여, 나에 의해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그대는 참으로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밧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양면으로 해탈한 비구가 있다. 그에게 내가 ‘오라, 비구여, 나를 위해 그대는 진흙탕에서 다리가 되어달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지나가거나, 다른 생각으로 몸을 뒤틀거나, ‘안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밧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혜해탈한 비구가 있다. … 몸으로 체험한 비구 … 견해를 성취한 비구 … 믿음으로 해탈한 비구 … 법을 따르는 비구 … 믿음을 따르는 비구가 있다. 그에게 내가 ‘오라, 비구여, 나를 위해 그대는 진흙탕에서 다리가 되어달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지나가거나, 다른 생각으로 몸을 뒤틀거나, ‘안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밧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밧달리여, 그대는 그때 양면해탈자이거나, 혜해탈자이거나, 몸으로 체험한 자이거나, 견해를 성취한 자이거나, 믿음으로 해탈한 자이거나, 법을 따르는 자이거나, 믿음을 따르는 자였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nanu tvaṃ, bhaddāli, tasmiṃ samaye ritto tuccho aparaddho”ti?
“밧달리여, 그때 그대는 결핍되고 비어있고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저에게,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
“밧달리여, 나에 의해 비구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한 그대는 참으로 무지와 어리석음과 능숙하지 못함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밧달리여,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았기 때문에 그대를 우리는 받아들인다. 비구여, 이 성스러운 율에서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고, 미래에 단속하는 자는 향상한다.
여기, 밧달리여,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하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ㅡ ‘내가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지(知)와 견(見)의 성취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런 곳으로 가서 머무는 그에게 스승도 나무라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고, 신들도 나무라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란다. 스승으로부터도 나무람을 받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로부터도 알아본 뒤에 나무람을 받고, 신들로부터도 나무람을 받고,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나무라는 그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지(知)와 견(見)의 성취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실현하지 못함]이 있다.
여기, 밧달리여,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ㅡ ‘내가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지(知)와 견(見)의 성취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런 곳으로 가서 머무는 그에게 스승도 나무라지 않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지 않고, 신들도 나무라지 않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다. 스승으로부터도 나무람을 받지 않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로부터도 알아본 뒤에 나무람을 받지 않고, 신들로부터도 나무람을 받지 않고,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그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지(知)와 견(見)의 성취를 실현한다. 그는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로부터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기쁨의 빛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한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전생의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즉 ㅡ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진화[소멸]하는 여러 겁, 세계가 퇴보하는[일어나는] 여러 겁, 세계가 진화하고 퇴보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 ㅡ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본다.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안다. ㅡ ‘이들은 신(身)으로 나쁜 삶을 살고 구(口)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신(身)으로 좋은 삶을 살고 구(口)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들이 번뇌[루(漏)]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유루(有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그것이 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