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haddālisuttaṃ (MN 65-받달리 경)
2. bhikkhuvaggo, 5. bhaddālisuttaṃ (MN 65-받달리 경)
• ekāsana ― sitting alone/solitude/one sitting; one time/one seat; one chair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이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는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는다. 비구들이여, 한 번 음식을 먹는 나는 압박 없음과 병 없음과 가벼움과 힘과 편히 머묾을 함께 안다[상(想)한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한 번 음식을 먹어라. 비구들이여, 한 번 음식을 먹는 그대들도 압박 없음과 병 없음과 가벼움과 힘과 편히 머묾을 함께 알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받달리 존자가 세존에게 “대덕이시여, 저는 한 번 음식을 먹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음식을 먹는 저에게 후회와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받달리여, 그대는 초청받은 곳에서 일부를 먹은 뒤에 일부를 가지고 온 뒤에 먹어도 좋다. 받달리여, 이렇게 한 번 먹는 그대도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먹는 것도, 대덕이시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먹는 저에게 후회와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받달리 존자는 세존이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제정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받달리 존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삼 개월 내내 세존의 곁에 오지 않았다.
그때 많은 비구가 ‘석 달이 지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는 여정을 떠나실 것이다.’라면서 세존을 위해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받달리 존자가 그 비구들에게 왔다. 와서는 그 비구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받달리 존자에게 그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 “도반 받달리여, 세존을 위해 이 가사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석 달이 지나고 가사가 완성되면 세존께서는 여정을 떠나실 것입니다. 오십시오, 도반 받달리여, 결점이 되는 이것을 잘 사고하십시오. 나중에 더 어려움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받달리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받달리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제가 세존께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에게,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놓아주십시오[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는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내가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대는, 받달리여, ‘세존은 사왓티에 머문다. 세존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받달리여, ‘많은 비구가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받달리여, ‘많은 비구니가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받달리여, ‘많은 남신자가 사왓티에 산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받달리여, ‘많은 여신자가 사왓티에 산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받달리여, ‘많은 외도의 사문-바라문들이 사왓티에서 안거를 지냈다. 그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받달리 비구,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어떤 장로 비구라고 나를 알 것이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받달리여, 그대는 이런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덕이시여,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제가 세존께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는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내가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받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양면으로 해탈한 비구가 있다. 그에게 내가 ‘오라, 비구여, 나를 위해 그대는 진흙탕에서 다리가 되어달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지나가거나, 다른 생각으로 몸을 뒤틀거나, ‘안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받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혜해탈한 비구가 있다. … 몸으로 실현한 비구 … 견해를 성취한 비구 … 믿음으로 해탈한 비구 … 법을 따르는 비구 … 믿음을 따르는 비구가 있다. 그에게 내가 ‘오라, 비구여, 나를 위해 그대는 진흙탕에서 다리가 되어달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지나가거나, 다른 생각으로 몸을 뒤틀거나, ‘안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받달리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받달리여, 그대는 그때 양면해탈자거나, 혜해탈자이거나, 몸으로 실현한 자이거나, 견해를 성취한 자이거나, 믿음으로 해탈한 자이거나, 법을 따르는 자이거나, 믿음을 따르는 자였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nanu tvaṃ, bhaddāli, tasmiṃ samaye ritto tuccho aparaddho”ti?
“받달리여, 그때 그대는 결핍되고 비어있고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제가 세존께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미래의 단속을 위해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는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비구 상가가 받아 지니도록 내가 선언한 학습계율에 대한 공부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밧달리여,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에 따라 바로잡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인다. 비구여,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본 뒤에 법답게 바로잡고, 미래에 단속하는 자는 이 성스러운 율에서 향상한다.
여기,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한 어떤 비구가 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내가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知)와 견(見)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런 곳으로 가서 머무는 그에게 스승도 나무라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고, 신들도 나무라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란다. 스승도 나무라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고, 신들도 나무라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라는 그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한 어떤 비구가 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내가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런 곳으로 가서 머무는 그에게 스승도 나무라지 않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지 않고, 신들도 나무라지 않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다. 스승도 나무라지 않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알아본 뒤에 나무라지 않고, 신들도 나무라지 않고, 자신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그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실현한다. 그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받달리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받달리여, 비구는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받달리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한다[전생 기억].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한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줄어들고 자라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한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본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들이 번뇌[루(漏)]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유루(有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받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받달리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에게는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합니까? 대덕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에게는 그렇게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까?”
“여기, 받달리여, 상습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잘못을 저지르는 어떤 비구가 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낸다. 바름을 일으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때,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상습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저지릅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냅니다. 바름을 일으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자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지 않는 방법을 거듭 적용해 이 비구를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받달리여, 비구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지 않는 방법을 이런 그 비구에게 거듭 적용해 조사한다.
여기, 받달리여, 상습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잘못을 저지르는 어떤 비구가 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지 않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지 않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름을 일으키고, 순종하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상습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저지릅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지 않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지 않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바름을 일으키고, 순종하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존자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방법을 거듭 적용해 이 비구를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받달리여, 비구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방법을 이런 그 비구에게 거듭 적용해 조사한다.
여기, 받달리여, 의도치 않게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어떤 비구가 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낸다. 바름을 일으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때,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의도치 않게 잘못을 저지르고, 많이 저지르지 않습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냅니다. 바름을 일으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자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지 않는 방법을 거듭 적용해 이 비구를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받달리여, 비구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지 않는 방법을 이런 그 비구에게 거듭 적용해 조사한다.
여기, 받달리여, 의도치 않게 잘못을 저지르고, 자주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어떤 비구가 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지 않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지 않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름을 일으키고, 순종하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의도치 않게 잘못을 저지르고, 많이 저지르지 않습니다.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는 그는 다른 것에 의해 다른 것을 대처하지 않고, 주제 밖의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를 떨쳐버리지 않고,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바름을 일으키고, 순종하고,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하고, ‘상가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존자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방법을 거듭 적용해 이 비구를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받달리여, 비구들은 이 사건을 빠르게 가라앉히지 않는 방법을 이런 그 비구에게 거듭 적용해 조사한다.
여기, 받달리여,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떤 비구가 있다. 거기서,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 비구에게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하더라도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이 그로부터 쇠퇴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예를 들면, 받달리여, 눈이 하나뿐인 사람이 있다.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 하나의 눈마저 쇠약해지지 말기를!’이라고 하면서 그 하나의 눈을 보호할 것이다. 이처럼, 받달리여,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떤 비구가 있다. 거기서, 받달리여,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이 비구에게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하더라도 오롯한 믿음과 오롯한 사랑이 그로부터 쇠퇴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받달리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에게는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한다. 받달리여, 이런 원인, 이런 조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에게는 그렇게 거듭 강제하여 상가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대덕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예전에는 더 적은 학습계율이 있었지만, 더 많은 비구가 무위(無爲)의 앎을 실현했습니까? 대덕이시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지금은 더 많은 학습계율이 있지만, 더 적은 비구들이 무위(無爲)의 앎을 실현합니까?”
“받달리여, 그것은 이러하다. 중생들이 쇠퇴할 때, 정법이 사라질 때, 더 많은 학습계율이 있고 더 적은 비구들이 무위(無爲)의 앎을 실현한다. 받달리여,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이 상가에 나타나지 않는 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하지 않는다.
받달리여,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이 상가에 나타날 때 스승은 그 번뇌의 영향을 받는 법들에 저항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받달리여, 상가가 커지지 않는 한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은 상가에 나타나지 않는다. 받달리여, 상가가 커질 때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이 상가에 나타난다. 그러면 스승은 그 번뇌의 영향을 받는 법들에 저항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받달리여, 상가가 으뜸가는 얻음에 도달하지 않는 한, 으뜸가는 명성에 도달하지 않는 한, 심오한 앎에 도달하지 않는 한, 오래 되지 않는 한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은 상가에 나타나지 않는다. 받달리여, 상가가 오래될 때 여기 번뇌의 영향을 받는 어떤 법들이 상가에 나타난다. 그러면 스승은 그 번뇌의 영향을 받는 법들에 저항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받달리여, 내가 그대들에게 좋은 혈통을 가진 젊은 말의 비유로 법문을 설했을 때 그대들 몇 명이 있었다. 받달리여,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는가?”
“no hetaṃ, bhante”.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받달리여, 거기에 어떤 원인이 있었는가?”
“그런 제가, 대덕이시여, 오랫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받달리여, 단지 그런 원인, 그런 조건만이 아니다. 더욱이 받달리여, 나는 그대를 오랫동안의 심(心)에 의한 심(心)의 분별로써 알고 있다. — ‘이 어리석은 자는 내가 선언한 법에 대해 골격을 만들고 작의(作意)하고 모든 심(心)을 집중하여 귀 기울인 자로서 법을 듣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받달리여, 나는 그대에게 좋은 혈통을 가진 젊은 말의 비유의 법문을 설하겠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받달리 존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예를 들면, 받달리여, 능숙한 말 조련사는 당당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을 얻은 뒤에 첫 번째로 굴레를 차는 훈련을 시킨다. 예전에 그런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 굴레를 차는 훈련을 받는 그 말은 어떤 훈련들에 대해서든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버둥거린다.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는 그 말은 그 상태에 대해 익숙해진다.
받달리여,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은 당당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이 그 상태에 익숙해질 때, 그 말 조련사는 더 나아가 마구를 차는 훈련을 시킨다. 예전에 그런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 마구를 차는 훈련을 받는 그 말은 어떤 훈련들에 대해서든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버둥거린다.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는 그 말은 그 상태에 대해 익숙해진다.
받달리여,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은 당당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이 그 상태에 익숙해질 때, 그 말 조련사는 더 나아가 ①보조를 맞추고, ②둥글게 돌고, ③뒷발로 차고, ④달리고, ⑤돌진하고, ⑥왕의 품성을 갖추고, ⑦왕의 자질을 갖추고, ⑧최상의 속력을 갖추고, ⑨최상의 말이 되고, ⑩최상의 우정을 갖추는 훈련을 시킨다. 예전에 그런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 보조를 맞추고, 둥글게 돌고, 뒷발로 차고, 달리고, 돌진하고, 왕의 품성을 갖추고, 왕의 자질을 갖추고, 최상의 속력을 갖추고, 최상의 말이 되고, 최상의 우정을 갖추는 훈련을 받는 그 말은 어떤 훈련들에 대해서든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버둥거린다.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는 그 말은 그 상태에 대해 익숙해진다.
받달리여, 계속되는 훈련, 점진적인 훈련을 받은 당당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이 그 상태에 익숙해질 때, 그 말 조련사는 더 나아가 용모를 꾸미고 생명을 돌보는 보답을 한다.
받달리여, 이런 열 가지 요소를 갖춘 당당하고 좋은 혈통을 가진 말은 왕에게 어울리고, 왕에게 쓰일만하고, 왕의 요소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처럼, 받달리여,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이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 어떤 열 가지인가? 여기, 받달리여, 비구는 무학(無學)의 정견(正見)을 갖춘다. 무학의 정사유(正思惟)를 갖춘다. 무학의 정어(正語)를 갖춘다. 무학의 정업(正業)을 갖춘다. 무학의 정명(正命)을 갖춘다. 무학의 정정진(正精進)을 갖춘다. 무학의 정념(正念)을 갖춘다. 무학의 정정(正定)을 갖춘다. 무학의 정지(正知)를 갖춘다. 무학의 정해탈(正解脫)을 갖춘다. — 받달리여, 이런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이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