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ṭukikopamasuttaṃ (MN 66-메추라기 비유 경) - 네 부류의 사람
2. bhikkhuvaggo, 6. laṭukikopamasuttaṃ (MN 66-메추라기 비유 경)
우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무엇이 넷인가?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할 때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그는 그것을 허락하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할 때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할 때 이따금 알아차림이 혼란해져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우다이여, 일어남은 느리지만, 그는 그것을 빠르게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예를 들면, 우다이여, 사람이 온종일 달구어진 철판 위에 두세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지만 그것은 즉시에 증발해서 사라진다. 이처럼, 우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한다. 그가 재생의 조건을 버리고 재생의 조건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실천할 때 이따금 알아차림이 혼란해져 재생의 조건과 연결된 기억과 사유가 발생한다. 우다이여, 알아차림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는 그것을 빠르게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속박된 자’라고 나는 말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여기 우다이여, 어떤 사람은 ‘집착은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알아서 재생의 조건을 벗어나고, 재생의 조건을 파괴하고, 해탈한다. 우다이여, 이런 사람을 나는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하지 ‘속박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다이여, 기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안다. 우다이여, 세상에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우다이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 ― 이것이, 우다이여,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 이것이 소유의 즐거움[욕락(慾樂)], 불결한 즐거움, 평범한 즐거움, 성스럽지 못한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그 즐거움은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하고, 많이 행하지 않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우다이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한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출리(出離)의 즐거움, 여읨의 즐거움, 가라앉음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그 즐거움은 실천해야 하고, 닦아야 하고, 많이 행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