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naḷakapānasuttaṃ (MN 68-날라까빠나 경)
2. bhikkhuvaggo, 8. naḷakapānasuttaṃ (MN 68-날라까빠나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꼬살라에서 날라까빠나의 빨라사 숲에 머물렀다. 그때 잘 알려진 많은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세존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는데, 아누룻다 존자, 받디야 존자, 끼밀라 존자, 바구 존자, 꼰단냐 존자, 레와따 존자, 아난다 존자 그리고 다른 잘 알려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었다. 그때 세존은 비구 상가에 둘러싸여 열린 장소에 앉아있었다. 그때 세존은 그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 대해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범행을 기뻐하고 있는가?”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두 번째도 세존은 그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 대해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범행을 기뻐하고 있는가?”라고. 두 번째도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세 번째도 세존은 그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 대해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범행을 기뻐하고 있는가?”라고. 세 번째도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그러자 세존에게 “내가 그 좋은 가문의 아들들에게 물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은 아누룻다 존자에게 “아누룻다들이여, 그대들은 범행을 기뻐하고 있는가?”라고 말했다. “참으로 대덕이시여, 저희는 범행을 기뻐합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누룻다여! 아누룻다여,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범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적절한 것이다. 아누룻다여, 그대들에게 소유의 삶을 즐기게 하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에도 불구하고,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검은 머리의 소년이고 상서로운 젊음을 갖춘 초년기의 젊은 나이일 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런 그대들은, 아누룻다여, 왕의 명령 때문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고, 도둑에게 강제되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고, 빚 때문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고, 생계 때문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에 떨어진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전체 괴로움 무더기의 끝맺음이 알려지게 된다면!’이라면서,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아누룻다여, 이렇게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누룻다여, 소유의 삶을 떨치고 불선법들을 떨친 기쁨과 행복 또는 그보다 더 평화로운 다른 것을 성취하지 못한 그에게 간탐도 심(心)을 소진하여 머물고, 진에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고, 해태-혼침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고, 들뜸-후회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고, 의심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고, 불쾌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고, 권태도 심을 소진하여 머문다. 아누룻다여, 그는 소유의 삶을 떨치고 불선법들을 떨친 기쁨과 행복 또는 그보다 더 평화로운 다른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아누룻다여, 소유의 삶을 떨치고 불선법들을 떨친 기쁨과 행복 또는 그보다 더 평화로운 다른 것을 성취한 그에게 간탐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진에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해태-혼침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들뜸-후회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의심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불쾌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고, 권태도 심을 소진하여 머물지 않는다. 아누룻다여, 그는 소유의 삶을 떨치고 불선법들을 떨친 기쁨과 행복 또는 그보다 더 평화로운 다른 것을 성취한다.
• (MN 14-괴로움 무더기 작은 경) 75. 참조 ― ‘aññatreva kāmehi aññatra akusalehi dhammehi 소유의 삶과 다른 곳, 불선법(不善法)들과 다른 곳에서’ 기쁨과 행복 또는 그보다 더 평화로운 다른 것을 ~
“아누룻다들이여, 그대들은 나에 대해 ‘여래에게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報)가 괴로움인 번뇌들(*)이 버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래는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수용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참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피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제거한다.’라고 생각하는가?” “대덕이시여, 저희는 ‘여래에게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가 괴로움인 번뇌들이 버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래는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수용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참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피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제거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저희는 세존에 대해 ‘여래에게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가 괴로움인 번뇌들이 버려졌다. 그래서 여래는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수용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참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피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제거한다.’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누룻다들이여. 여래에게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가 괴로움인 번뇌들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아누룻다들이여,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는 다시 자라지 못한다. 이처럼, 아누룻다들이여, 여래에게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가 괴로움인 번뇌들은 모두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여래는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수용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참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피하고, 헤아리면서 어떤 것을 제거한다.
(*) 「ponobbhavika 또는 ponobhavika의 용례」 참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누룻다여? 어떤 이유를 보기에 여래는 죽어서 가버린 제자의 태어남에 대해서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고,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다.’라고 말하는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아누룻다여, 여래가 죽어서 가버린 제자의 태어남에 대해서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고,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탁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얻음과 존경과 명성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나를 이렇게 알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아누룻다여, 믿음이 있고, 큰 외경심이 있고, 큰 환희가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있다. 그들은 그 말을 들은 뒤에 그것을 위하여 심(心)을 집중한다. 그들에게, 아누룻다여, 그것은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가 ‘이런 이름의 비구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무위(無爲)의 앎에 확고하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가 ‘이런 이름의 비구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化生)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가 ‘이런 이름의 비구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지고 탐진치(貪嗔癡)가 엷어졌기 때문에 한 번 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온 뒤에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가 ‘이런 이름의 비구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니가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죽었다. 세존은 그 비구니에 대해 ‘무위의 앎에 확고하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니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니가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죽었다. 세존은 그 비구니에 대해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化生)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니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니가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죽었다. 세존은 그 비구니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지고 탐진치(貪嗔癡)가 엷어졌기 때문에 한 번 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온 뒤에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니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비구니가 ‘이런 이름의 비구니가 죽었다. 세존은 그 비구니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스님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비구니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남신자가 ‘이런 이름의 남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化生)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남신자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남신자가 ‘이런 이름의 남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지고 탐진치(貪嗔癡)가 엷어졌기 때문에 한 번 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온 뒤에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남신자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남신자가 ‘이런 이름의 남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 존자는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는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 존자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남신자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여신자가 ‘이런 이름의 여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녀에 대해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화생(化生)하고, 거기서 완전히 열반하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분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여신자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여신자가 ‘이런 이름의 여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녀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지고 탐진치(貪嗔癡)가 엷어졌기 때문에 한 번 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온 뒤에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분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여신자는 편히 머문다.
여기, 아누룻다여, 어떤 여신자가 ‘이런 이름의 여신자가 죽었다. 세존은 그녀에 대해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여서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말했다.’라고 듣는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계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법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지혜를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머묾을 가졌다고도, 그분은 이런 해탈을 가졌다고도.’ 그분에 대해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심을 집중한다. 이렇게도, 아누룻다여, 여신자는 편히 머문다.
이렇게, 아누룻다여, 여래가 죽어서 가버린 제자의 태어남에 대해서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고, 누구는 이런 곳에 태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탁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얻음과 존경과 명성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나를 이렇게 알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아누룻다여, 믿음이 있고, 큰 외경심이 있고, 큰 환희가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있다. 그들은 그 말을 들은 뒤에 그것을 위하여 심을 집중한다. 그들에게, 아누룻다여, 그것은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아누룻다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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