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īṭāgirisuttaṃ (MN 70-끼따기리 경)
2. bhikkhuvaggo, 10. kīṭāgirisuttaṃ (MN 70-끼따기리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까시에서 큰 비구 상가와 함께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그때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다[저녁을 먹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나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안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어라.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알 것이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까시에서 차례로 돌아다니던 세존은 끼따기리라는 까시의 번화가에 도착했다. 세존은 거기 끼따기리라는 까시의 번화가에서 머물렀다.
그때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라는 비구들이 끼따기리에 살고 있었다. 그때 많은 비구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갔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상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알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규정되지 않은 때에)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 kālika: temporal 현세적인, 속세의. 시간의, 시간의 제약을 받는.
•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ati ― (SN 1.20-사믿디 경)/(SN 4.21-많은 비구 경)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대덕이시여, 저희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갔습니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상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비구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알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대덕이시여,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대덕이시여. 저희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저희는 세존께 이 일을 말씀드립니다.”라고.
그러자 세존은 어떤 비구에게 말했다. —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말하라. —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릅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에게 대답한 뒤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갔다. 가서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릅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앗사지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많은 비구가 그대들에게 가서 ‘도반들이여, 세존과 비구 상가는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습니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면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오직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으십시오. 도반들이여, 밤의 식사로부터 다른 때에 먹는 그대들도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알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그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는 우리는 병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몸이 가벼워 활력적이고, 힘 있고, 편히 머묾을 압니다. 그런 우리가 왜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저녁과 아침과 낮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라고.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이 사람은 누구든지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나에 의해 설해진 이런 법을 아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①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들고,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나고, ②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들고,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나고, ③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들고,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나에 의해 설해진 이런 법을 아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즐거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로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운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로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운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나에게 타당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여기 어떤 사람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내가 지혜로써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성취했기 때문에 ‘이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비구에게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모든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불방일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구들이여, 위 없는 유가안온을 갈망하며 머무는, 의(意)가 도달하지 못한 유학(有學)인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果)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일곱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일곱인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 혜해탈자(慧解脫者), 몸으로 실현한 자, 견해를 성취한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면해탈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色)을 넘어선 무색(無色)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고,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이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양면해탈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불방일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혜해탈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않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이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혜해탈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불방일에 의한 것은 행해졌다. 그들이 방일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몸으로 실현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고,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한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몸으로 실현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견해를 성취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가 선언한 법들을 지혜로써 충분히 이해하고 꿰뚫는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견해를 성취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해탈한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고, 뿌리내리고, 확립되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법을 따르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가 선언한 법들을 지혜로써 웬만큼 이해한다. 또한,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사띠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지혜의 기능이라는 이런 법들이 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법을 따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을 따르는 자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색을 넘어선 무색의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실현하여 머물지 못하지만,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의 일부가 다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이 웬만하고, 사랑이 웬만하다. 또한,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사띠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지혜의 기능이라는 이런 법들이 있다.’ 이런 사람이, 비구들이여,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비구에게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기능들을 갖춘 이 존자들은 아마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 없는 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과를 보는 나는 ‘불방일로써 해야 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즉시에 성취되는 무위(無爲)의 앎을 말하지 않는다[무위(無爲)의 앎이 즉시에 성취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성과, 점진적인 실천으로부터 무위의 앎은 성취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점진적인 공부, 점진적인 성과, 점진적인 실천으로부터 무위의 앎은 성취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믿음이 생긴 자는 가까이한다. 가까이하는 자는 섬긴다. 섬기는 자는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이는 자는 법을 배운다. 배운 뒤에 법을 명심한다. 명심한 법들의 의미를 조사한다. 의미를 조사하는 자에게 법들은 기쁨을 준다. 법이 기쁨을 줄 때 관심이 생긴다. 관심이 생긴 자는 시도한다. 시도한 뒤에 판단한다. 판단한 뒤에 정진한다. 단호한 의지를 가진 자는 몸으로 궁극의 진리(참)를 실현하고, 지혜로써 그것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런 믿음이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가까이함도 없었고, 비구들이여, 그런 섬김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귀를 기울임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법을 배움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법을 명심함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의미를 조사함도 없었다. 비구들이여, 그런 법은 기쁨을 주지도 않고, 비구들이여, 그런 관심도 생기지 않고, 비구들이여, 그런 시도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판단도 없고, 비구들이여, 그런 정진도 없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잘못된 행동이 있었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잘못된 실천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이 쓸모없는 자들은 이 법과 율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비구들이여, 네 구절로 된 설명이 있다. 그것을 암송할 때, 현명한 사람은 오래지 않아 지혜로써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 암송할 테니,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암송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저희는 누구이고, 대덕이시여, 법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비구들이여, 재물에 관심이 있고, 재물의 후계자고, 재물 때문에 교제하며 머무는 스승에게도 ‘저희가 이렇게 된다면 그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흥정하듯 접근하지 않아야 하는데, 비구들이여, 재물에 의한 교제를 완전히 떠난 여래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이런 법이 뒤따라야 한다. — ‘세존은 스승이시고, 나는 제자다. 세존은 알고, 나는 모른다.’라고.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스승의 가르침은 원기를 북돋워 주고 자양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이런 법이 뒤따라야 한다. — ‘참으로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고, 몸에서 살과 피가 말라버려라! 남자의 힘과 남자의 정진과 남자의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것을 얻지 않는 한 정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믿음을 가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들어갈 때 지금여기에서 무위의 앎을 성취하거나, 집착이 있을 때 불환자의 상태를 성취하는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가 예상된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