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dīghanakhasuttaṃ (MN 74-디가나카 경)
3. paribbājakavaggo, 4. dīghanakhasuttaṃ (MN 74-디가나카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의 수까라카따에 머물렀다. 그때 디가나카 유행승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디가나카 유행승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마 존자여, 나는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악기웻사나여,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견해도 그대에게 인정되지 않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저에게 이 견해가 인정된다고 해도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악기웻사나여,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견해를 버리지 않고 다른 견해를 붙잡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고, 더 많습니다. 악기웻사나여,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붙잡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는 적고, 더 적습니다.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악기웻사나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들에게 그 견해는 친밀에 가깝고, 족쇄에 가깝고, 기쁨에 가깝고, 묶임에 가깝고, 집착에 가깝습니다.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들에게 그 견해는 친밀하지 않음에 가깝고, 족쇄 아님에 가깝고, 기뻐하지 않음에 가깝고, 묶이지 않음에 가깝고, 집착하지 않음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디가나카 유행승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에게 속한 견해를 칭찬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에게 속한 견해를 매우 칭찬합니다.”라고.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자신이 인정하는 견해는 친밀에 가깝고, 족쇄에 가깝고, 기쁨에 가깝고, 묶임에 가깝고, 집착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친밀하지 않음에 가깝고, 족쇄 아님에 가깝고, 기뻐하지 않음에 가깝고, 묶이지 않음에 가깝고, 집착하지 않음에 가깝습니다.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 가운데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내가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견해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에게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 이런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이렇게 이의제기가 있을 때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을 때 성가심이 있고, 성가심이 있을 때 짜증이 있다.’라고. 이렇게 자신에게서 이의제기와 다툼과 성가심과 짜증을 관찰하는 그는 그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붙잡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버립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놓습니다.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 가운데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내가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견해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에게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 이런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이렇게 이의제기가 있을 때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을 때 성가심이 있고, 성가심이 있을 때 짜증이 있다.’라고. 이렇게 자신에게서 이의제기와 다툼과 성가심과 짜증을 관찰하는 그는 그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붙잡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버립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놓습니다.
거기서 악기웻사나여,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 가운데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만약 내가 ‘나는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견해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나에게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이나 바라문 — 이런 두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이렇게 이의제기가 있을 때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을 때 성가심이 있고, 성가심이 있을 때 짜증이 있다.’라고. 이렇게 자신에게서 이의제기와 다툼과 성가심과 짜증을 관찰하는 그는 그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붙잡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버립니다. 이렇게 그 견해들을 놓습니다.
악기웻사나여, 이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아픔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他)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 몸을 무상하고 고이고 아픔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결점이고 남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관찰하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 몸에 대한 애정, 몸에 대한 순종이 몸에서 버려집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런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악기웻사나여,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 경험합니다. 악기웻사나여,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 경험합니다. 악기웻사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 경험합니다. 즐거운 느낌도, 악기웻사나여,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되었고 부서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이고 바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도, 악기웻사나여,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되었고 부서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이고 바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악기웻사나여, 무상하고 유위이고 연기되었고 부서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이고 바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합니다. 염오하는 자는 이탐합니다. 이탐으로부터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해탈된 심(心)을 가진 비구는 누구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말해진 것을 붙잡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에게 부채를 부치면서 세존의 뒤에 서 있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참으로 세존께서는 거듭 그 법들을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버리는 것을 말씀하셨다. 참으로 선서께서는 거듭 그 법들을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놓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이것을 숙고하는 사리뿟따 존자의 심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해탈했다.
그리고 디가나카 유행승에게 ‘자라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법안(法眼)]이 생겼다. 그렇게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관통하고, 의심을 건너고, 불확실에서 벗어나고, 자기 확신을 얻고, 스승의 가르침에서 다른 스승을 의지하지 않게 된 디가나카 유행승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