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akasuttaṃ (MN 76-산다까 경) ㅡ (223-232) 범행의 삶이 아닌 것과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
3. paribbājakavaggo, 6. sandakasuttaṃ (MN 76-산다까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꼬삼비에서 고시따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산다까 유행승이 오백 명의 유행승으로 구성된 유행승의 큰 모임과 함께 삘락카 동굴에 머물렀다. 그리고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아난다 존자가 비구들에게 말했다. — “오시오, 도반들이여, 동굴을 보러 데와까따 호수로 갑시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많은 비구와 함께 데와까따 호수로 갔다. 그때 산다까 유행승은 많은 유행승의 모임과 함께 시끄럽고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예를 들면, ‘왕에 관한 이야기, 도둑에 관한 이야기, 대신에 관한 이야기, 군대에 관한 이야기,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 전쟁에 관한 이야기, 음식에 관한 이야기, 마실 것에 관한 이야기, 옷에 관한 이야기, 침대에 관한 이야기, 화환에 관한 이야기, 향에 관한 이야기, 친척에 관한 이야기, 탈 것에 관한 이야기, 마을에 관한 이야기, 번화가에 관한 이야기, 도시에 관한 이야기, 국가에 관한 이야기, 여자에 관한 이야기, 영웅에 관한 이야기, 거리에 관한 이야기, 장독대에 관한 이야기, 죽은 자에 관한 이야기,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 관한 이야기, 바다에 관한 이야기, 존재와 비존재에 관해 이러하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유치한 이야기를 하면서 앉아있었다. 산다까 유행승은 멀리서 오고 있는 아난다 존자를 보았다. 본 뒤에 자기의 모임을 정돈시켰다. —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옵니다. 내가 알기로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이 꼬삼비에 머물고 있는데, 이 사문 아난다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오. 그 존자들은 조용하기를 원하고, 조용하도록 훈련되었고, 조용함을 칭찬하오. 만약 조용한 모임이 있다고 알면 가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래서 그 유행승들은 조용히 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산다까 유행승에게 갔다.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오십시오, 아난다 존자여. 아난다 존자께서는 잘 오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께서는 여기에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께서는 준비된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아난다 존자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산다까 유행승은 어떤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산다까 유행승에게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산다까여, 무슨 이야기를 위해 지금 여기에 함께 모여 앉았습니까? 그대들 간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아난다 존자여, 저희가 지금 모여 앉아서 하는 이야기는 내버려 두십시오. 이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아난다 존자가 듣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존자의 스승의 가르침을 분명히 말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산다까여, 들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산다까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이런 네 가지 범행 아닌 삶과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아난다 존자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이런 네 가지 범행 아닌 삶과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은 무엇이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합니까?”
”여기, 산다까여,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봉헌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게 과도 없고 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은 없다.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 사대(四大), 이것이 사람이다. 죽을 때 땅은 땅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물은 물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불은 불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바람은 바람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기능들은 공간으로 옮겨간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가고, 화장장까지만 구절들이 보이고, 잿빛 뼛가루들이 있다. 헌공은 떨어지고,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있음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공허와 거짓과 쓸데없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도 현명한 자들도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이후는 없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봉헌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게 과도 없고 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은 없다.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 사대(四大), 이것이 사람이다. 죽을 때 땅은 땅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물은 물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불은 불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바람은 바람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기능들은 공간으로 옮겨간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가고, 화장장까지만 구절들이 보이고, 잿빛 뼛가루들이 있다. 헌공은 떨어지고,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있음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공허와 거짓과 쓸데없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도 현명한 자들도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이후는 없다.’라고. 만약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 없이 대등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이후는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사족(蛇足)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의 백단향을 경험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金)과 은(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에게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
그는 ‘이것은 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첫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고, 살육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고문하고 고문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자선을 베풀고, 자선을 베풀게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행하는 자와 행하게 하는 자, 자르는 자와 자르게 하는 자, 고문하는 자와 고문하게 하는 자, 슬퍼지는 자와 슬퍼하게 하는 자, 지친 자와 지치게 하는 자, 전율하는 자와 전율하게 하는 자, 생명을 해침당하게 하는 자,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 집을 부수는 자, 약탈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노상 강도질을 하는 자, 남의 아내를 범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등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만약 면도날 같은 끝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으깨고 하나의 살점으로 만들지라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남쪽 기슭에 가서 죽이고, 살육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고문하고 고문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악이 없고, 악의 결과가 없다. 만약 강가 강의 북쪽 기슭에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자선을 베풀고, 자선을 베풀게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 보시와 길들임과 자신의 제어와 사실을 말함에 의한 공덕이 없고, 공덕의 결과가 없다.’라고. 만약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 없이 대등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사족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의 백단향을 경험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과 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에게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
그는 ‘이것은 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두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오염될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청정해질 것이다. 자신의 행위도 없고, 남의 행위도 없고, 인간의 행위도 없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다운 힘도 없고, 남자다운 노력도 없다. 모든 중생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은 권한이 없고, 힘이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결합과 상태의 성숙을 원인으로 여섯 종류의 태어남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중생들의 오염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오염될 것이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중생들은 청정해질 것이다. 자신의 행위도 없고, 남의 행위도 없고, 인간의 행위도 없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남자다운 힘도 없고, 남자다운 노력도 없다. 모든 중생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은 권한이 없고, 힘이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결합과 상태의 성숙을 원인으로 여섯 종류의 태어남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라고. 만약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 없이 대등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청정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사족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의 백단향을 경험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과 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에게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
그는 ‘이것은 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세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렇게 주장하고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런 일곱 가지 몸들이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그 둘 모두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일곱입니까?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 번째로 생명 —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몸이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그 둘 모두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고 알게 하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일곱 가지 몸들의 사이에 의해 갈라진 틈을 칼이 지나간 것이다. 140만 가지의 주된 모태가 있고, 그리고 다시 6,600가지 모태가 있습니다. 500가지의 업이 있고, 다섯 가지, 세 가지의 업이 있고, 완전한 업이 있고 반쯤의 업이 있다. 62가지 실천이 있고 62가지 중간 겁이 있다. 여섯 가지 태어남이 있고 여덟 가지 인간의 영역이 있고 4,900의 생명체가 있고 4,900의 유행승이 있고 4,900의 용이 있다. 2,000의 감각기관이 있고, 3,000의 지옥이 있고, 36가지의 티끌의 요소가 있고, 일곱 가지 상(想)이 있는 모태와 일곱 가지 상(想)이 없는 모태와 일곱 가지 니간타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신, 일곱 가지 인간, 일곱 가지 유령, 일곱 가지 호수, 일곱 가지 매듭, 700가지 매듭, 일곱 가지 갈라진 틈, 700가지 갈라진 틈, 일곱 가지 꿈, 700가지 꿈이 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옮겨가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내는 840만의 대겁(大劫)이 있다. 거기에는 ‘나는 계나 관행이나 고행이나 범행으로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겠다거나 익은 업을 닿고 또 닿아서 끝내겠다.’라는 것은 없다. 참으로 이렇게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제약이 있는 윤회에서는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끌어올리거나 끌어내릴 수 없다. 예를 들면,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굴러간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옮겨가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낸다.’라고.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분,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런 일곱 가지 몸들이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그 둘 모두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일곱입니까?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 번째로 생명 —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아니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서 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일곱 가지 몸이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그 둘 모두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고 알게 하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일곱 가지 몸들의 사이에 의해 갈라진 틈을 칼이 지나간 것이다. 140만 가지의 주된 모태가 있고, 그리고 다시 6,600가지 모태가 있습니다. 500가지의 업이 있고, 다섯 가지, 세 가지의 업이 있고, 완전한 업이 있고 반쯤의 업이 있다. 62가지 실천이 있고 62가지 중간 겁이 있다. 여섯 가지 태어남이 있고 여덟 가지 인간의 영역이 있고 4,900의 생명체가 있고 4,900의 유행승이 있고 4,900의 용이 있다. 2,000의 감각기관이 있고, 3,000의 지옥이 있고, 36가지의 티끌의 요소가 있고, 일곱 가지 상(想)이 있는 모태와 일곱 가지 상(想)이 없는 모태와 일곱 가지 니간타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신, 일곱 가지 인간, 일곱 가지 유령, 일곱 가지 호수, 일곱 가지 매듭, 700가지 매듭, 일곱 가지 갈라진 틈, 700가지 갈라진 틈, 일곱 가지 꿈, 700가지 꿈이 있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옮겨가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내는 840만의 대겁(大劫)이 있다. 거기에는 ‘나는 계나 관행이나 고행이나 범행으로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겠다거나 익은 업을 닿고 또 닿아서 끝내겠다.’라는 것은 없다. 참으로 이렇게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제약이 있는 윤회에서는 줄이거나 늘일 수 없으며, 끌어올리거나 끌어내릴 수 없다. 예를 들면,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 다 풀릴 때까지 굴러간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옮겨가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을 끝낸다.’라고. 만약 이분, 스승이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여기서 나는 행하지 않고도 행한 것이고, 여기서 나는 완성하지 않고도 완성한 것이다. 우리 둘도 여기서 차별 없이 대등한 경지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다 옮겨가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분, 스승이 나체로 다니고, 머리를 깎고, 웅크리는 노력을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것은 사족이다. 나는 자식들로 북적거리는 집에서 살고, 까시의 백단향을 경험하고, 꽃과 향과 화장품을 지니고, 금과 은이 허용된 자인데, 미래에 다시 태어남에 있어, 이분, 스승과 갈 곳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이 스승에게서 범행을 실천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 것인가?’
그는 ‘이것은 범행의 삶이 아니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번째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만큼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범행 아닌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범행 아닌 삶’이라고 설하신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시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은 무엇이어서,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합니까?”
”여기, 산다까여,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라면서 ‘나에게는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항상 계속해서 앎과 봄이 나타난다.’라고 남김 없는 앎과 봄을 인정합니다.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가 물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를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말을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황소를 마주치기도 하고, 여자나 남자의 이름과 성을 묻기도 하고, 마을이나 번화가의 이름과 길을 묻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질문받은 그는 ‘‘내가 빈집에 들어가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들어갔다.’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얻지 못했다.’ ‘개가 물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렸다.’ ‘사나운 코끼리를 마주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주쳤다.’ ‘사나운 말을 마주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주쳤다.’ ‘사나운 황소를 마주치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주쳤다.’ ‘여자나 남자의 이름과 성을 묻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 ‘마을이나 번화가의 이름과 길을 묻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라고 대답합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 스승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라면서 ‘나는 가고 서고 자고 깰 때 언제나 항상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남김 없는 앎과 봄을 인정한다. … ‘마을이나 번화가의 이름과 길을 묻게끔 정해져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물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첫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전승, 이러저러하다고 계승된 것, 성전의 자료에 의해 법을 설합니다. 그러나 산다까여,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스승에게는 잘 배운 것도 있고, 잘못 배운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 스승은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긴다. 그는 전승, 이러저러하다고 계승된 것, 성전의 자료에 의해 법을 설한다. 그러나 전승에서 배우고 전승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스승에게는 잘 배운 것도 있고, 잘못 배운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두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딱끼(takkī)이고, 위망시(vīmaṃsī)입니다. 그는 딱까를 두드리고 관찰을 동반하여 자신이 이해한 법을 설합니다. 그러나 산다까여, 딱끼이고 위망시인 스승에게는 딱까를 잘 본 것도 있고, 딱까를 잘못 본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 스승은 딱끼이고, 위망시이다. 그는 딱까를 두드리고 관찰을 동반하여 자신이 이해한 법을 설한다. 그러나 딱끼이고 위망시인 스승에게는 딱까를 잘 본 것도 있고, 딱까를 잘못 본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세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습니다. 그는 나태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는 나태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이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그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다르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지 않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다.’라고 혼란스럽게 말하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갑니다.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이 스승은 나태하고 어리석다. 그는 나태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이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그렇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다르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고, ‘아니지 않다’라는 생각도 나에게 없다.’라고 혼란스럽게 말하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간다.’ 그는 ‘이것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다.’라고 안 뒤에 그 범행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납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번째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산다까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하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만큼이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네 가지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에서는 확실히 범행으로 살지 못할 것이고, 범행으로 산다고 해도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시여, 그분, 스승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분이어서, 거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확실히 범행으로 살고, 범행을 사는 자는 유익한 법으로 이끄는 방법을 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