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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akasuttaṃ (MN 76-산다까 경) ㅡ (233-236) 스승의 가르침
233. “idha, sandak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 pe ...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여기, 산다까여, 여래-아라한-정등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 그는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심(心)의 오염원인 이런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서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pe...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다시, 산다까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2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 pe ...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다시, 산다까여, 비구는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다시, 산다까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4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so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 pe ...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전생 기억].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줄어들고 자라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합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s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 pe ...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s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ime āsav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으로 심(心)을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들이 번뇌[루(漏)]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에서도 심(心)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유루(有漏)]에서도 심이 해탈하고,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에서도 심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산다까여, 이런 스승에게서 제자는 이런 고귀함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확실한 범행을 살 것이고, 범행을 사는 자는 방법이 되는 유익한 법을 얻을 것입니다.”
234. “yo pana so, bho ānand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paribhuñjeyya so kāme”ti? “yo so, sandak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pañcaṭṭhānāni ajjhācari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ñcicca pāṇaṃ jīvitā vorope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adinnaṃ theyyasaṅkhātaṃ ādā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methunaṃ dhammaṃ paṭiseve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mpajānamusā bhāsi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nnidhikārakaṃ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pi pubbe agāriyabhūto. yo so, sandak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imāni pañcaṭṭhānāni ajjhācaritun”ti.
“아난다 존자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가 소유의 삶을 즐길 수 있습니까?” “산다까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다섯 가지 경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고의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음행을 할 수 없습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알면서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예전에 재가자일 때처럼 소유물을 쌓아두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산다까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다섯 가지 경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235. “yo pana so, bho ānand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paccupaṭṭhitaṃ — ‘khīṇā me āsavā’”ti? “tena hi, sandaka, upamaṃ te karissāmi; upamāyapidhekacce viññū purisā bhāsitassa atthaṃ ājānanti. seyyathāpi, sandaka, purisassa hatthapādā chinnā;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jānāti — ‘chinnā me hatthapādā’ti, udāhu paccavekkhamāno jānāti — ‘chinnā me hatthapādā’”ti? “na kho, bho ānanda, so puriso satataṃ samitaṃ jānāti — ‘chinnā me hatthapādā’ ti.) api ca kho pana naṃ paccavekkhamāno jānāti — ‘chinnā me hatthapādā’”ti. “evameva kho, sandaka, yo so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na paccupaṭṭhitaṃ — ‘khīṇā me āsavā’ti;) api ca kho pana naṃ paccavekkhamāno jānāti — ‘khīṇā me āsavā’”ti.
“아난다 존자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에게 ‘나에게 번뇌가 다했다.’라고 걸어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항상 이어지는 앎과 봄이 현전합니까?” “그렇다면 산다까여, 그대에게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비유에 의해서도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말의 의미를 압니다. 예를 들면, 산다까여, 어떤 사람이 팔다리가 잘렸습니다. 그는 걸어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항상 이어서 (‘나는 팔다리가 잘렸다.’라고 압니까? 아니면 반조할 때 ‘나는 팔다리가 잘렸다.’라고 압니까?” “아난다 존자여, 그 사람은 항상 이어서 ‘나는 팔다리가 잘렸다.’라고 알지 않습니다.) 보다는 반조할 때 ‘나는 팔다리가 잘렸다.’라고 압니다.” “이처럼, 산다까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에게 걸어갈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항상 이어서 (‘나에게 번뇌가 다했다.’라는 앎과 봄이 현전하지는 않습니다.) 보다는 반조할 때 ‘나에게 번뇌가 다했다.’라고 압니다.”
236. “kīvabahukā pana, bho ānanda, imasmiṃ dhammavinaye niyyātāro”ti? “na kho, sandaka, ekaṃyeva sataṃ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imasmiṃ dhammavinaye niyyātāro”ti. “acchariyaṃ, bho ānanda, abbhutaṃ, bho ānanda! na ca nāma sadhammokkaṃsanā bhavissati, na paradhammavambhanā, āyatane ca dhammadesanā tāva bahukā ca niyyātāro paññāyissanti. ime panājīvakā puttamatāya puttā attānañceva ukkaṃsenti, pare ca vambhenti tayo ceva niyyātāro paññapenti, seyyathidaṃ — nandaṃ vacchaṃ, kisaṃ saṃkiccaṃ, makkhaliṃ gosālan”ti. atha kho sandako paribbājako sakaṃ parisaṃ āmantesi — “carantu bhonto samaṇe gotame brahmacariyavāso. na dāni sukaraṃ amhehi lābhasakkārasiloke pariccajitun”ti. iti hidaṃ sandako paribbājako sakaṃ parisaṃ uyyojesi bhagavati brahmacariyeti.
“그런데 아난다 존자여, 이 법과 율에는 구원된 자가 얼마나 됩니까?” “산다까여, 단지 일백 명도 아니고, 이백 명도 아니고, 삼백 명도 아니고, 사백 명도 아니고, 오백 명도 아닙니다. 이 법과 율에서 구원된 자는 훨씬 더 많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참으로 자신의 법을 칭찬하지 않고, 남의 법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토대 위에서 법을 설함으로써 그렇게 많은 구원된 자를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자의 아들인 이 아지와까들은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난하지만, 난다 왓차, 끼사 상낏짜, 막칼리 고살라 등 세 사람의 구원된 자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모임에게 말했다. — “존자들은 사문 고따마 존자에게서 범행의 삶을 실천하시오. 지금 우리에게서 얻음과 존경과 명성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라고. 이렇게 산다까 유행승은 자신의 모임에 세존에게서 범행을 실천할 것을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