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aṇamuṇḍikasuttaṃ (MN 78-사문 문디까 경)
3. paribbājakavaggo, 8. samaṇamuṇḍikasuttaṃ (MN 78-사문 문디까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이 오백 명의 큰 유행승 집단과 함께 띤두까 나무껍질로 지어지고 하나의 강당으로 된 토론장인 말리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런데 빤짜깡가 건축가가 세존을 뵙기 위해 이른 아침에 사왓티에서 나왔다. 그러나 빤짜깡가 건축사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세존을 뵙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가 아니다. 세존은 홀로 머무시는 분이다. 의(意)를 닦아야 하는 비구들을 뵙기 위한 때도 아니다. 의를 닦아야 하는 비구들은 홀로 머무시는 분들이다. 나는 띤두까 나무껍질로 지어지고 하나의 강당으로 된 토론장인 말리까 사원에 있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에게 가면 어떨까?”라고. 그래서 빤짜깡가 건축사는 띤두까 나무껍질로 지어지고 하나의 강당으로 된 토론장인 말리까 사원에 있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에게 갔다.
그때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은 큰 유행승 집단과 함께 시끄럽고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예를 들면, ‘왕에 관한 이야기, 도둑에 관한 이야기, 대신에 관한 이야기, 군대에 관한 이야기,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 전쟁에 관한 이야기, 음식에 관한 이야기, 마실 것에 관한 이야기, 옷에 관한 이야기, 침대에 관한 이야기, 화환에 관한 이야기, 향에 관한 이야기, 친척에 관한 이야기, 탈 것에 관한 이야기, 마을에 관한 이야기, 번화가에 관한 이야기, 도시에 관한 이야기, 국가에 관한 이야기, 여자에 관한 이야기, 영웅에 관한 이야기, 거리에 관한 이야기, 장독대에 관한 이야기, 죽은 자에 관한 이야기,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 관한 이야기, 바다에 관한 이야기, 존재와 비존재에 관해 이러하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유치한 이야기를 하면서 앉아있었다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은 멀리서 오고 있는 빤짜깡가 건축가를 보았다. 본 뒤에 자기의 집단을 정돈시켰다. ― “존자들은 조용히 하십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빤짜깡가 건축가가 옵니다. 사왓티에 살고 있는 사문 고따마의 흰옷을 입은 재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빤짜깡가 건축가가 있습니다. 그 존자들은 조용하기를 원하고 조용하도록 훈련되었고 조용함을 칭찬합니다. 만약 조용한 모임이 있다고 알면 가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행승들은 조용히 했다.
그때 빤짜깡가 건축가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에게 갔다. 가서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건축가에게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이 이렇게 말했다. ― “장자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善)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어떤 넷입니까? 여기, 장자여, 몸으로 악한 업을 짓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악한 사유를 하지 않고, 악한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장자여, 나는 이 네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빤짜깡가 건축가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의 말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나는 세존의 앞에서 이 말의 의미를 알아봐야겠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다. 빤짜깡가 건축가는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건축가는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과 함께 나눈 우정의 대화를 그대로 모두 세존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은 빤짜깡가 건축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 “건축가여,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의 말과 같다면,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자일 것이다. 건축가여,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몸이라고 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 알맞은 움직임도 없는데 어디로부터 몸에 의한 악업을 지을 것인가? 건축가여,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말이라고 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 알맞은 울음도 없는데 어디로부터 말에 의한 악업을 지을 것인가? 건축가여,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사유라고 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 알맞은 지저귐도 없는데 어디로부터 악한 사유를 할 것인가? 건축가여,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참으로 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 어머니의 젖도 없는데 어디로부터 악한 생활을 할 것인가? 건축가여, 사문 문디까의 아들인 욱가하마나 유행승의 말과 같다면,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자일 것이다.
※ ‘daharassa hi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의 용례 → (MN 64-말루꺄 큰 경)
건축가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도 아니고, 궁극의 선도 아니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도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오히려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 어린아이가 (그를) 능가하여 머문다.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건축가여, 몸으로 악한 업을 짓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악한 사유를 하지 않고, 악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 건축가여, 네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도 아니고, 궁극의 선도 아니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도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오히려 어리고 게으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 어린아이가 (그를) 능가하여 머문다.
건축가여, 열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것이 불선(不善)의 계행(戒行)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불선의 계행은 여기로부터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불선의 계행은 여기에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불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것이 선(善)의 계행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선의 계행은 여기로부터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선의 계행은 여기에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것이 불선의 사유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불선의 사유는 여기로부터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불선의 사유는 여기에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불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것이 선의 사유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선의 사유는 여기로부터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선의 사유는 여기에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건축가여, 무엇이 불선의 계행인가? 불선의 몸의 업, 불선의 말의 업, 악한 생활 ― 건축가여, 이것이 불선의 계행이라고 불린다.
건축가여, 무엇이 이 불선의 계행의 일어남인가? 그것들의 일어남도 말했으니, 심(心)의 일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심인가? 심도 참으로 많고 다양하고 여러 종류가 있다. 탐이 있는, 진이 있는, 치가 있는 심으로부터 불선의 계행은 일어난다.
건축가여, 이 불선의 계행은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것들의 소멸도 말했다.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몸의 나쁜 행위를 버리고 몸의 좋은 행위를 닦는다. 말의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말의 좋은 행위를 닦는다. 의의 나쁜 행위를 버리고 의의 좋은 행위를 닦는다. 삿된 생활을 버리고 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한다. ― 여기서 이 불선의 계행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건축가여, 어떤 실천이 불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인가?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악한 불선법들이 버려지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나지 않은 선법들이 생겨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선법들이 유지되고, 혼란스럽지 않게 되고, 점점 더 커져서 가득 차게 되고, 닦아서 완성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불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러면, 건축가여, 무엇이 선의 계행인가? 선의 몸의 업, 선의 말의 업이다. 건축가여, 청정한 생활도 계에서 나는 말한다. 건축가여, 이것이 선의 계행이라고 불린다.
건축가여, 무엇이 이 선의 계행의 일어남인가? 그것들의 일어남도 말했으니, 심의 일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심인가? 심도 참으로 많고 다양하고 여러 종류가 있다. 탐이 없는, 진이 없는, 치가 없는 심으로부터 선의 계행은 일어난다.
건축가여, 이 선의 계행은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것들의 소멸도 말했다.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계를 중시한다. 그러나 계만으로 구성된 자는 아니다. 선의 계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건축가여, 어떤 실천이 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인가?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악한 불선법들이 버려지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나지 않은 선법들이 생겨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선법들이 유지되고, 혼란스럽지 않게 되고, 점점 더 커져서 가득 차게 되고, 닦아서 완성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선의 계행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러면, 건축가여, 무엇이 불선의 사유인가? 소유의 사유, 분노의 사유, 폭력의 사유 ― 건축가여, 이것이 불선의 사유라고 불린다.
건축가여, 무엇이 이 불선의 사유의 일어남인가? 그것들의 일어남도 말했으니, 상(想)의 일어남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상인가? 상도 참으로 많고 다양하고 여러 종류가 있다. 소유의 상, 분노의 상, 폭력의 상 ― 이것으로부터 불선의 사유는 일어난다.
건축가여, 이 불선의 사유는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것들의 소멸도 말했다.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서 이 불선의 사유가 남김없이 소멸한다.
건축가여, 어떤 실천이 불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인가?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악한 불선법들이 버려지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나지 않은 선법들이 생겨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선법들이 유지되고, 혼란스럽지 않게 되고, 점점 더 커져서 가득 차게 되고, 닦아서 완성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불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러면, 건축가여, 무엇이 선의 사유인가? 출리의 사유, 분노하지 않는 사유, 비폭력의 사유 ― 건축가여, 이것이 선의 사유라고 불린다.
건축가여, 무엇이 이 선의 사유의 일어남인가? 그것들의 일어남도 말했으니, 상(想)의 일어남이라고 말해져야 한다. 어떤 상인가? 상도 참으로 많고 다양하고 여러 종류가 있다. 출리의 상, 분노하지 않는 상, 비폭력의 상 ― 이것으로부터 선의 사유는 일어난다.
건축가여, 이 선의 사유는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것들의 소멸도 말했다.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서 이 선의 사유가 남김없이 소멸한다.
건축가여, 어떤 실천이 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인가?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선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악한 불선법들이 버려지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나지 않은 선법들이 생겨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생겨난 선법들이 유지되고, 혼란스럽지 않게 되고, 점점 더 커져서 가득 차게 되고, 닦아서 완성되도록 관심을 생기게 하고, 노력하고, 힘을 다하고, 심을 돌보고, 애쓴다. 건축가여, 이런 실천이 선의 사유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러면, 건축가여, 어떤 열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이라고 나는 말하는가? 여기, 건축가여, 비구는 무학(無學)의 정견(正見)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사유(正思惟)를 갖추었고, 무학의 정어(正語)를 갖추었고, 무학의 정업(正業)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명(正命)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정진(正精進)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념(正念)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정(正定)을 갖추었고, 무학의 정지(正知)를 갖추었고, 무학의 정해탈(正解脫)을 갖추었다. 건축가여, 이런 열 가지 법을 갖춘 사람을 선을 갖춘 자, 궁극의 선, 최상의 경지를 얻은 정복할 수 없는 사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빤짜깡가 건축사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