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80. 웨카나사 경[최상의 광명-소유의 즐거움(慾樂)-혜해탈자 비판](근본경전연구회 해…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80. 웨카나사 경[최상의 광명-소유의 즐거움(慾樂)-혜해탈자 비판](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111)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unpchKu6Tk
웨카나사 유행승의 “이것이 최상의 광명이다.”라는 감흥에 이어소유의 즐거움으로 주제는 진행됩니다. 소유의 즐거움은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데, 「소유의 사유 → 소유의 관심 →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 → 소유의 즐거움」으로 해석됩니다. 소유의 삶에서 생기는 소유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소유의 끝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거기에서 으뜸입니다. 한편, 웨카나사 유행승은 혜해탈자를 비판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비판을 하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서 정직하고 속이지 않고 올곧음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 오면 가르치고 법을 설한다고 합니다. ― 사문 됨 =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나는 것
• 세존과 웨카나사 유행승의 대화
1. 웨카나사 유행승의 감흥 ― “이것이 최상의 광명이다. 이것이 최상의 광명이다.”
; (MN 79-사꿀루다이 짧은 경)에서처럼, 이것이 유행승들의 교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MN 79-사꿀루다이 짧은 경)은 ‘최상의 광명’에 대한 대화 이후에 오로지 행복한 세상과 그 실현을 위한 실천으로 주제가 이어지는데, 이 경에서는 소유의 즐거움[kāmasukha-욕락(慾樂)]으로 진행됩니다.
2. (세존) 소유의 즐거움[욕락(慾樂)] =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
; 소유의 사유(kāma) → 소유의 관심(kāmacchanda) →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kāmaguṇa) → 소유의 즐거움[kāmasukha-욕락(慾樂)]
▣ 주제의 확장 ― (77)「소유의 즐거움[kāmasukha-욕락(慾樂)]」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219
→ 소유의 삶(kāmā)으로부터 소유의 즐거움이 있는데, 소유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소유의 끝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거기에서 으뜸 ― 소유의 끝자리를 차지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소유의 끝에 설 때 만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즐거움 즉 존재의 즐거움이 더 낫다는 의미
→ 다른 견해, 다른 믿음, 다른 성향이 있고, 다른 방법으로 수행하고, 다른 스승을 따르는 유행승으로는 알기 어렵고,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알 수 있음
; 소유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불환자(不還者), 존재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아라한(阿羅漢) ― 「[특강] 높은 흐름에 든 자=색구경천에 태어나는 불환자[오종불환](통합본)(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106)」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4&wr_id=71
3. (웨카나사 유행승) ― 과거의 끝[숙주명(宿住明)]을 모르고 미래의 끝[천안명(天眼明)]을 보지 못하면서 깨달음을 선언하는 것은 궁핍하고, 단지 이름만 얻는 것이고, 공허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세존을 헐뜯는 말을 함
; 숙주명(宿住明)과 천안명(天眼明) 없는 깨달음의 선언 즉 혜해탈자(慧解脫者)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것인데, 누진명(漏盡明)에 의한 혜해탈자의 개념은 불교 밖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유의 끝에서 만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알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혜해탈자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존) 그런 비판을 하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유행승)이 있음(*). 그러나 과거의 끝과 미래의 끝은 그만두고, 정직하고 속이지 않고 올곧음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 오면 가르치고 법을 설한다고 함. → 실 끈에 묶인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기능이 성숙하면 그 묶임에서 벗어나듯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사문 됨(sāmañña)에 대해 알고 볼 것 ― 사문 됨 =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나는 것
(*) 국내외의 기존 번역은 sahadhammika를 법다움으로 해석하여 웨카나사 유행승의 이런 비판이 합당한 비판이라고 부처님이 답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자칫 혜해탈자에 대한 비판이 법다운 질책이라고 부처님이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sahadhammika: co-religionist. (adj.) 같은 종교의 사람’이어서 그런 비판을 하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유행승)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데, (SN 12.70-수시마 경)의 수시마 유행승의 일화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숙주명-천안명은 그만두고라도 누진(漏盡)에 의해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나는 것으로 사문 됨을 말하여 혜해탈자(慧解脫者)의 관점을 드러내 줍니다.
→ (SN 12.70-수시마 경) 참조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106
※ 육차결집본과 PTS본의 차이
(육차결집본)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nacirasseva sāmaññeva ñassati sāmaṃ dakkhiti — evaṃ kira sammā bandhanā vippamokkho hoti, yadidaṃ avijjā bandhanā
(PTS본) yath'ānusiṭṭ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na cirass'eva sāmaṃ ñeva ñassati sāmaṃ dakkhiti. Evaṃ kira sammā bandhanā vippamokkho hoti yad idaṃ avijjābandhanā.
― 육차결집본은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사문 됨(sāmañña)에 대해 알고 볼 것이라면서 사문 됨의 내용으로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나는 것을 설명함
― PTS본은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sāmaṃ) 알고 스스로 보아서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난다고 설명함
→ 육차결집본은 ‘사문 됨 = 무명(無明)의 속박에서 바르게 풀려나는 것’을 설명하지만 PTS본은 사문 됨에 대한 설명 없이 무명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설명하는 차이가 있음
4. 웨카나사 유행승이 귀의하여 재가 신자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