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ñcattayasuttaṃ (MN 102-다섯이면서 셋 경)
1. devadahavaggo, 2. pañcattayasuttaṃ (MN 102-다섯이면서 셋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미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말하는 미래의 겁(劫)에 관한 설(說)을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아(我)는 상(想)이 있고 죽은 뒤에 아픔이 없다.’라고 여기서 어떤 자들은 말한다. ⓑ‘아(我)는 상(想)이 없고 죽은 뒤에 아픔이 없다.’라고 여기서 어떤 자들은 말한다. ⓒ‘아(我)는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 아픔이 없다.’라고 여기서 어떤 자들은 말한다. 또는 어떤 자들은 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거나,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①죽은 뒤에 아픔이 없는 아(我)의 존재를 선언한다, ②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③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이것들은 다섯이었다가 셋이 되고, 셋이었다가 다섯이 된다. — 이것이 다섯이면서 셋의 대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단일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다양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제한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무한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한다.
또는 ㉨이것을 넘어선 어떤 자(*1)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무한하고 흔들림 없는 식(識)의 까시나를 선언한다(*2).
(*1) 공무변처(空無邊處-ākāsānañcāyatana) ― 「sabbaso ①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②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③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①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 색(色)에 대한[있다는-없다는-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상(想)을 넘어섬으로부터
②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 저항[제한된]의 상(想)이 줄어듦으로부터
③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 다양한 상을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부터
완전하게 색상(色想)을 넘어서고, 저항의 상(想)이 줄어들고, 다양한 상(想)을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2)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 : 식(識)의 까시나(kasiṇa: whole; entire) →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선언.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단일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다양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제한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데 무한한 상(想)인 아(我)를 선언한다. 또는 어떤 자들은 ㉨색상(色想)들이든 무색상(無色想)들이든 단일한 상(想)들이든 다양한 상(想)들이든 그 상(想)들 가운데 청정(淸淨)하고 최상이고 으뜸이고 위없다고 알려진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한하고 흔들림 없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선언한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거기서 그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상(想)은 아픔이고, 상(想)은 종기고, 상(想)은 화살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상(想)이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데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는 색(色)과 다른 곳에서, 수(受)와 다른 곳에서, 상(想)과 다른 곳에서, 행(行)들과 다른 곳에서 식(識)의 오고 감, 죽고 태어남, 늘어나고 자라고 충만함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경우는 없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한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그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또한,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상(想)은 아픔이고, 상(想)은 종기고, 상(想)은 화살이다. 상(想)이 없음은 당황[혼란스러움]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想)이 없는 것도 아님[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기도 하고 색(色)이 없기도 한 아(我)를 선언하거나,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색(色)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色)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보인 것, 들린 것, 닿아 안 것, 인식되어야 하는 것과 행(行)들에 의해 이 경지의 증득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누구든지, 비구들이여, 그것은 이 경지의 증득을 위해서는 방해되는 것이라고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경지는 행(行)의 증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알려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 경지는 남아있는 행(行)들의 증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알려진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②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은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또한,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도 비난한다. 또한, 죽은 뒤에 아픔이 없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想)이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도 비난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모두 ‘죽은 뒤에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 죽은 뒤에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앞으로 나아가는 집착을 선언한다. 예를 들면, 장사를 위해 나아가는 장사꾼은 ‘앞으로 이것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이것이 얻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생각건대, 이 사문-바라문들은 ‘죽은 뒤에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 죽은 뒤에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장사꾼의 비유가 분명해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②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그들은 유신(有身)에 대한 두려움과 유신에 대한 혐오 때문에 유신의 주위를 달리고, 맴돈다. 예를 들면, 줄에 묶인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에 가죽끈으로 묶인 개는 그 말뚝이나 기둥의 주위를 달리고, 맴돈다. 이처럼 이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유신(有身)에 대한 두려움과 유신에 대한 혐오 때문에 유신의 주위를 달리고, 맴돈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미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말하는 미래의 겁(劫)에 관한 설(說)을 가진 사문-바라문들은 누구든지 모두 이 다섯 가지 경우거나 그들 가운데 어떤 것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과거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말하는 과거의 겁(劫)에 관한 설(說)을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끝이 없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단일한 상(想)이 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다양한 상(想)이 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제한된 상(想)이 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무량한 상(想)이 있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오로지 행복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오로지 괴롭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행복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아(我)와 세상은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여기 어떤 자는 말한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믿음과 다른 곳, 성향과 다른 곳, 전승과 다른 곳,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곳,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곳에서 청정하고 순수한 개별적 앎이 있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청정하고 순수한 개별적 앎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거기서 앎의 일부를 순수하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집착이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기도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 아(我)와 세상은 영원하지도 영원하지 않지도 않다. …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다. … ‘아(我)와 세상은 끝이 없다. …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 ‘아(我)와 세상은 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 ‘아(我)와 세상은 단일한 상(想)이 있다. … ‘아(我)와 세상은 다양한 상(想)이 있다. … ‘아(我)와 세상은 제한된 상(想)이 있다. … ‘아(我)와 세상은 무량한 상(想)이 있다. … ‘아(我)와 세상은 오로지 행복하다. … ‘아(我)와 세상은 오로지 괴롭다. … ‘아(我)와 세상은 행복하기도 괴롭기도 하다. … ‘아(我)와 세상은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믿음과 다른 곳, 성향과 다른 곳, 전승과 다른 곳,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곳,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곳에서 청정하고 순수한 개별적 앎이 있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청정하고 순수한 개별적 앎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거기서 앎의 일부를 순수하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집착이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여기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여읨의 희열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여읨의 희열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여읨의 희열이 소멸한다.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고뇌가 생기고, 고뇌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그늘이 떠난 것이 햇볕이 미치는 것이고, 햇볕이 떠난 것이 그늘이 미치는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고뇌가 생기고, 고뇌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이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는 여읨의 희열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여읨의 희열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여읨의 희열이 소멸한다.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고뇌가 생기고, 고뇌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여기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여읨의 희열을 넘어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소멸한다.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기고,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그늘이 떠난 것이 햇볕이 미치는 것이고, 햇볕이 떠난 것이 그늘이 미치는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기고,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과거에 대한 견해를 붙잡지 않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붙잡지 않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이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는 여읨의 희열을 넘어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소멸한다.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여읨의 희열이 생기고, 여읨의 희열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여기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여읨의 희열을 넘어서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넘어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기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그늘이 떠난 것이 햇볕이 미치는 것이고, 햇볕이 떠난 것이 그늘이 미치는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기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이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는 여읨의 희열을 넘어서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넘어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문다.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그에게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소멸로부터 개발된 느낌인 행복이 생기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의 소멸로부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여기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여읨의 희열을 넘어서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넘어서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넘어서서 ‘나는 평화롭고, 나는 꺼졌고, 나는 집착이 없다.’라고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실답게 안다.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이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는 여읨의 희열을 넘어서고,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넘어서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넘어서서 ‘나는 평화롭고, 나는 꺼졌고, 나는 집착이 없다.’라고 관찰한다. 참으로 이 존자는 열반(涅槃)에 적합한 실천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가 붙잡는 자여서 과거에 대한 견해를 붙잡거나, 붙잡는 자여서 미래에 대한 견해를 붙잡거나, 붙잡는 자여서 소유의 족쇄를 붙잡거나, 붙잡는 자여서 여읨의 희열을 붙잡거나, 붙잡는 자여서 개발된 느낌인 행복을 붙잡거나, 붙잡는 자여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붙잡는다. 그러면서도 이 존자가 ‘나는 평화롭고, 나는 꺼졌고, 나는 집착이 없다.’라고 관찰할 때 그 사문-바라문 존자에게 집착이 알려진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에 의한 위없는,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이니 즉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 것이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