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맛지마니까야 관통법회 – 102. 다섯이면서 셋 경[무색계의 이해 및 평화롭고 뛰어난 것의 전개](근본경전연구회 해…
▣ 맛지마니까야 관통법회 – 102. 다섯이면서 셋 경[무색계의 이해 및 평화롭고 뛰어난 것의 전개](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0606)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_mU-KmGdc10
1. 경의 개요
(MN102-다섯이면서 셋 경)은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사문-바라문이 개발된 느낌의 향상 과정의 끝에 위없는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에 닿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을 위해 미래에 대한 견해와 과거에 대한 견해를 먼저 설명합니다.
미래의 견해에 대해서는 ①죽은 뒤에 아픔이 없는 아(我)의 존재의 선언, ②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의 선언, ③지금여기의 열반의 선언의 세 가지로 설명하는 방법과 ①을 상(想)이 있거나, 상(想)이 없거나,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想)이 없는 것도 아닌 세 가지 경우로 세분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다섯이면서 셋이라는 경의 이름의 의미입니다. 경은 ①과 ②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③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은 채 미래에 대한 견해는 모두 이 다섯 가지 경우거나 그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는 아(我)와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믿음-성향-전승-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견해와 통찰의 지속에서 생겨나는 견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림 즉 아(我)의 관점과 소유의 삶에서 벗어난 사문-바라문은 개발된 느낌의 향상 과정을 통해 열반에 적합한 실천을 하게 되고,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미래의 견해에 속하는 ‘③지금여기의 열반’은, (DN 1-범망경)에 의하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마음껏 충분히 즐김,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묾, 제2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묾, 제3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묾, 제4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묾으로 나타나는데, 개발된 느낌의 향상 과정인 ‘여읨의 희열 → 개발된 느낌인 행복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대응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적합한 실천은 ‘③지금여기의 열반’의 범주에서의 완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여래에 의한 위없는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입니다. ―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줄어듦-매력-위험-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함」
2. 무색계(無色界)의 이해 ― ①죽은 뒤에 아픔이 없는 아(我)의 존재의 선언
죽은 뒤에 아픔이 없는 아(我)의 존재 가운데 상(想)이 있는 아(我)에 대한 설명은 색(色)의 있음-없음-있기도 하고 없기도 함-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의 네 가지와 상(想)의 단일-다양, 제한-무한의 여덟 가지 경우를 제시한 뒤 이것을 넘어선 어떤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무한하고 흔들림 없는 식(識)의 까시나를 선언한다고 하는데, 공무변처(空無邊處)와 식무변처(識無邊處)로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상(想)들 가운데 청정(淸淨)하고 최상이고 으뜸이고 위없다고 알려진 무한하고 흔들림 없는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설명됩니다.
반면에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상(想)은 아픔이고 종기고 화살이지만 상(想)이 없음은 평화롭고 뛰어나다는 이유로 상(想)이 있는 아(我)를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我)를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상(想)은 아픔이고 종기고 화살이고, 상(想)이 없음은 당황[혼란스러움]이지만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想)이 없는 것도 아님[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은 평화롭고 뛰어나다는 이유로 상(想)이 있는 아(我) 또는 상(想)이 없는 아(我)를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을 비난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도 설명됩니다.
특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행(行)들의 증득으로 얻어진다고 선언하는데 그것은 이 경지의 증득을 위해서는 방해되는 것이고, 남아있는 행(行)들의 증득으로 얻어진다고 부처님은 말합니다.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는 상(想)의 증득으로 얻어지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남아있는 행(行)들의 증득으로 얻어진다는 설명인데,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안팎의 차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무소유처까지는 takka 밖 즉 몸과 함께하는 작용의 영역에서 행(行)에 의한 상(想)의 증득으로 얻어지지만, 비상비비상처는 몸과 함께하지 않는 작용의 영역 즉 takka 안에서 진행되는 형성작용[남아있는 행(行)]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는 상수멸(想受滅)의 증득에 크게 도움 되는 것으로의 사마타-위빳사나와도 궤를 같이합니다. (230816 수정)
3. 단멸론자들은 유신(有身)을 두려워하고 유신을 혐오하는 특징을 말합니다.
4. 과거에 대한 견해를 놓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놓고, 모든 소유의 족쇄를 버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로 ‘[우(憂-domanassa-고뇌) →] 여읨의 희열 → 개발된 느낌인 행복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단계적으로 제시한 뒤 ‘나는 평화롭고, 나는 꺼졌고, 나는 집착이 없다.’라고 관찰하는데, 이것이 열반(涅槃)에 적합한 실천입니다.
5. 여래는 그 경지를 넘어섬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친 것이다. 그러나 행(行)들의 소멸은 있다. 그것은 있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 그것의 해방(解放)을 보는 자인 여래는 그것을 넘어섰다.」라고 하여 부처님이 각각의 사문-바라문이 접근한 경지를 모두 넘어섰다고 알려주는데,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줄어듦-매력-위험-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6.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의 전개
각각의 경지에서 사문-바라문들은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이라고 말하는데, 「상(想)이 없음 → 비상비비상 → 여읨의 희열 → 개발된 느낌인 행복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때, 비상비비상까지는 아(我)의 관점에서의 접근이고, 그 이후는 벗어남의 과정에서의 접근인데 미래의 견해에 속하는 지금여기의 열반과 대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지를 넘어서서 여래에 의한 위없는 평화롭고 뛰어난 경지의 깨달음이 제시되는데,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의 입장에서 평화롭고 뛰어난 것은 열반입니다. ―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다. 즉 모든 행(行)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근저를 놓음이고, 애(愛)의 부서짐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