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kintisuttaṃ (MN 103-무엇이라고 경)
1. devadahavaggo, 3. kintisuttaṃ (MN 103-무엇이라고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삐시나라에서 발리하라나 숲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이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나에 대해 ‘옷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거처를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하는가, 아닌가?”라고. “대덕이시여, 저희는 세존에 대해 ‘옷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거처를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나에 대해 ‘옷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탁발 음식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거처를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하고, 이 세상과 저세상을 원인으로 사문 고따마는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나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덕이시여, 저희는 세존에 대해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는 세존께서는 연민으로 법을 설하신다.’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나에 대해 ‘연민하고, 이익을 바라는 세존께서는 연민으로 법을 설하신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실답게 안 뒤에 선언한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의 법들(*)에서 온전히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 법들을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그대들에게 법에 대한 공부(abhidhamma)에서 다른 주장을 하는 두 명의 비구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 존자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그대들이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에서도 다르고 표현에서도 다르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다른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에서도 다르고 표현에서도 다르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잘못 붙잡은 것을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하고, 잘 붙잡은 것을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한다. 잘못 붙잡은 것을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하고, 잘 붙잡은 것을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한 뒤에 법과 율을 말해야 한다.
(*) 『나는 불교를 믿는다』 138쪽 참조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 존자들은 의미는 다르지만, 표현은 일치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그대들이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는 다르지만, 표현은 일치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는 다르지만, 표현은 일치한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다른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는 다르지만, 표현은 일치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는 다르지만, 표현은 일치한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잘못 붙잡은 것은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하고, 잘 붙잡은 것은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한다. 잘못 붙잡은 것을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하고, 잘 붙잡은 것을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한 뒤에 법과 율을 말해야 한다.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 존자들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표현은 다르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그대들이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표현은 다릅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표현은 다르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다른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표현은 다릅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표현은 다르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잘못 붙잡은 같은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하고, 잘 붙잡은 것은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해야 한다. 잘못 붙잡은 것을 잘못 붙잡은 것으로 수용하고, 잘 붙잡은 것을 잘 붙잡은 것으로 수용한 뒤에 법과 율을 말해야 한다.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 존자들은 의미도 일치하고 표현도 일치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그대들이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도 일치하고 표현도 일치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도 일치하고 표현도 일치한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다른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존자들의 주장은 의미도 일치하고 표현도 일치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의미도 일치하고 표현도 일치한다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자들은 분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잘 붙잡은 것은 잘 붙잡은 것으로 명심해야 한다. 잘 붙잡은 것을 잘 붙잡은 것으로 명심한 뒤에 법과 율을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 법들을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그대들 가운데 어떤 비구가 죄를 짓는다면, 거기서 비구들이여, 성급하게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 사람을 ‘이렇게 하면 나도 짜증나지 않을 것이고 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저 사람은 화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고 견해를 고수하지 않고 잘 놓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다.’라고 조사해야 한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이렇게 생각된다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나는 짜증나지 않겠지만 저 사람은 상처받을 것이다. 참으로 저 사람은 화나고 원한을 품겠지만 견해를 고수하지 않고 잘 놓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작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크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이렇게 생각된다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나는 짜증나겠지만 저 사람은 상처받을 않을 것이다. 참으로 저 사람은 화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겠지만 견해를 고수하고 놓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짜증나는 것은 작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크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이렇게 생각된다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나도 짜증날 것이고 저 사람도 상처받을 것이다. 참으로 저 사람은 화나고 원한을 품고 견해를 고수하고 놓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짜증나고 저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작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크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이렇게 생각된다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나도 짜증날 것이고 저 사람도 상처받을 것이다. 참으로 저 사람은 화나고 원한을 품고 견해를 고수하고 놓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을 불선(不善)에서 나오게 한 뒤 선(善)에 확고히 서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된다면,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에 대한 평정(무관심)은 경멸할 바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 법들을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그대들 가운데 상호 비방, 악한 견해, 심(心)의 분노, 불만, 노여움이 생긴다면, 그때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도반이여,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우리 가운데 상호 비방, 악한 견해, 심(心)의 분노, 불만, 노여움이 생긴 것을 아시면 사문께서 꾸짖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비구들이여, ‘도반이여,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우리 가운데 상호 비방, 악한 견해, 심(心)의 분노, 불만, 노여움이 생긴 것을 아시면 사문께서 꾸짖으실 것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반이여, 이 법을 버리지 않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비구들이여, ‘도반이여, 이 법을 버리지 않고서 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또한, 다른 한쪽의 비구들 가운데 더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비구에게 가서 ‘도반이여,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우리 가운데 상호 비방, 악한 견해, 심(心)의 분노, 불만, 노여움이 생긴 것을 아시면 사문께서 꾸짖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비구들이여, ‘도반이여, 화합하고 동의하고 분쟁하지 않고 공부하는 우리 가운데 상호 비방, 악한 견해, 심(心)의 분노, 불만, 노여움이 생긴 것을 아시면 사문께서 꾸짖으실 것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반이여, 이 법을 버리지 않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라면, 비구들이여, ‘도반이여, 이 법을 버리지 않고서 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만약에, 비구들이여, 그 비구에게 다른 비구들이 ‘존자 때문에 이 비구들이 불선(不善)에서 나와서 선(善)에 확고히 섰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여기, 도반들이여, 나는 세존에게 갔습니다. 그런 나에게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런 나는 법을 듣고서 그 비구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비구들은 그 법을 듣고 불선에서 나왔고 선에 확고히 섰습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는 비구는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한다. 법답게 질책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비난받지 않는다(**).”
(*) 용례 ― ①na attānukkaṃseti na paraṃ vambheti ― (DN 25.4)/(MN 29)/(MN 30)
②nevattānukkaṃseti na paraṃ vambheti ― (DN 33.7)/(MN 60)/(MN 113)
③na ceva attānaṃ ukkaṃseti, na paraṃ vambheti ― (MN 103)
(**) 용례 ― (DN 8.1)/(DN 28.18)/(MN 55)/(MN 71)/(MN 90)/(MN 103)/(MN 126)/(SN 22.2)/(SN 22.86)/(SN 35.81)/(SN 42.10)/(SN 42.12)/(SN 42.13)/(SN 44.2)/(SN 45.5)/(AN 8.12) ― 경 별 동사 활용의 차이 있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kintisuttaṃ niṭṭhitaṃ tatiyaṃ.
세 번째 무엇이라고 경이 끝났다.